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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03. 2023

함부로 여유로운 여행

갑자기 떠난 대만 여행 마지막 날

- 마지막까지 가볍게 -

마지막 날도 늦은 조식을 먹었다. 깊이 잠든 아들을 부러 깨우지 않았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어디라도 한 번 더 가야 한다며 안절부절못하지도 않았다. 짐을 싸던 아들이 말했다.

"여행이 끝났는데도 캐리어가 아주 여유로운데? 예전에는 맨날 어떻게든 문을 잠그려고 한 사람은 꾹꾹 누르고 한 사람은 지퍼 잠그고 했던 거 같은데..."

그랬다. 우리의 여행은 늘 그러했다. 얌전히 돌돌 말아 쌌던 옷들은 빨래거리가 되면 부피가 늘어나 있었다. 관광하며 쇼핑한 잡다한 물건들로 가방은 숨 쉴 구멍조차 남지 않았다. 공항에서 짐을 부치려다 초과 수하물이 되어 창피함을 무릅쓰고 짐을 펼쳐 무게 나갈만한 것들을 주섬주섬 빼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홀가분한 일정만큼이나 가방도 그랬다. 갖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이 없어서 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인지, 급하지 않으니 여유롭게 둘러보기만 해도 충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까지 가방은 가벼웠다.


- 망고빙수가 다했다 -

지하철을 타고 공항에 가는 길, 아들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더 망고빙수를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리끼리 1위로 선정한 맛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낮 12시면 한참 대기해야 한다는 후기와 달리 바로 주문하고 바로 먹을 수 있었다. 역시... 역시... 를 연발하며 맛있게 그릇을 비웠다.


대만에 가면 꼭 사야 한다는 누가크래커. 소문난 맛집 두 군데가 망고빙수집 근처에 있었는데 가볼 생각은 해보지 못했었다. '아침 8시에 가서 번호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샀다', '9시 반에 줄 섰는데 내 앞에서 끊겼다'는 후기를 접한 탓이었다. 근처까지 온 김에 혹시나 들렀는데 웬걸? 두 군데 모두 여유롭게 남아있었다.  나도 어딘가에 후기를 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12시에 갔는데도 한참 남아있었음. 지레 포기하지 말고 꼭 한 번 들러볼 것!"

누가크래커는 한국 대형마트에서도 손쉽게 살 수 있지만 현지 매장에서 산 것은 누가가 노글노글해서 맛있었다. 집에 포장해 온 치킨보다 매장에서 먹는 치킨이 더 맛있는 것과 같은 원리랄까.


망고빙수와 누가크래커를 운 좋게 입과 손에 채워 넣고 공항으로 향했다.


- 함부로 여유롭게 -

언젠가 여행에 관한 글을 쓰며 '완벽한 여행'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갈 것. 약간의 아쉬움 혹은 미련을 남길 것. 돌아갈 일상이 굳건히 기다리고 있을 것'

사랑하는 작은 아들과 함께 했고 돌아갈 일상은 있지만, 이번 여행은 아쉬움, 미련이 남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여유롭고 자유로웠으며 못 가본 곳, 못해본 것에 대한 아쉬움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완벽하다고 느꼈다. 완벽한 여행에 대해 재정의 내려야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갈 것. 돌아갈 일상이 굳건히 기다리고 있을 것. 내내 자유로울 것.


한국에 남아 각자의 일상을 열심히 이어간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 우리만 이렇게 여유롭게 즐겼어도 되는가 하는 일말의 죄책감을 지우고자 남편을 위한 위스키와 큰아들을 위한 고량주를 샀다. 환전했던 대만 화폐를 면세점에서 탈탈 털어 쓰고 동전 몇 개를 달그락 거리며 귀국길에 올랐다.



- 덧붙이는 이야기 -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런 사진들은 왜 찍는 거야?"

아들이 보기엔 내가 찍는 장면들이 꽤 생뚱맞았나 보다. 하등 쓸모없어 보이고 여행과도 무관해 보이는 사진을 왜 그리 열심히 찍는지 물었다. 내가 찍는 사진들 주로 우체국, 골목길, 집배원의 오토바이, 지하철 역사 같은 것들이었다. 왜 찍었을까... 뚜렷한 이유랄게 있을까. 그저 내 눈길이 머물었던 곳을 담는 게 사진이니 그것에 충실했을 뿐...

셀카봉도 챙겨가지 않은 탓에 우리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은 서너 장밖에 되지 않는다. 셀카봉은 일부러 챙기지 않았다. 셀카봉을 흔들어대는 나로 인해 아들이 스트레스받을 것을 염려한 까닭이다. 때문에 남은 건 온통 아들 사진뿐이다. 아들은 내 사진을 거의 찍어주지 않았다. 딱 한 번, 내가 요청했을 때 석양을 배경으로 찍어준 게 다다. 우리는 사진을 남기는 것에 있어서도 자유로웠던 셈이다.



갑자기 떠난 아들과의 여행.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기록으로 묶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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