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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05. 2020

완벽한 여행이란...

사랑, 미련, 일상...

지난 열흘 동안 방구석에서 다시 떠나본 2015년의 미국 가족여행은 코로나로 억제되어 있던 여행욕구를 솟구치게 했다. 꼭 미국이 아니라도 좋다. 해외가 아니어도 좋다.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가고 싶을 때 가는 여행.


숙소를 예약하고 일정을 짜면서 짐을 싸고 싶다. 어디를 들르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설렐 텐데... 해외로 간다면, 새벽녘 안개 낀 공항 가는 길을 조심조심 달리고 싶다. 캐리어를 끌며 공항을 누빌 때 이미 마음은 저 꼭대기까지 붕 떠있을 것이다. 비행기 냄새를 맡고 싶다. 승무원이 인사하며 좌석을 안내할 때 얼싸안고 기뻐할 것 같다. 얼마 만에 만나는 거냐고. 이륙까지 한참 걸리는 그 시간의 무료함이 그립다. 여행용으로 장만한 옷을 입고 길을 나서는 것, 맛은 없지만 특이한 음식의 사진을 찍는 것, 아침잠을 아껴가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조식을 먹으러 가는 것, 별로 필요하지는 않은 물건들을 쇼핑하는 것. 그 모든 것이 그립다.


5년 전의 여행이 완벽했다 생각하고 쓰기 시작한 글이 아니었다. 여행이 제한된 지금 지난 여행을 기록해보고자 했던 게 다였다. 그런데 여행을 복기하다 보니 '완벽한 여행'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세워졌다. 글의 힘인지, 여행의 힘인지...


'완벽한 여행'에 대한 '완벽한 정의'란 없다. 저마다의 정의가 다를 것이다.

나의 정의에는 세 가지 조건이 생겼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이어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 누구든 상관없다. 나와 평소에 정을 나누는 사람,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는 사람과의 여행이어야 한다. 평소, 관계가 좋을 때도 있고 갈등이 생길 때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배려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의 행복한 여행을 위해서도 꾸준히 노력한다. 그런 이들과 함께라면 여행에서 발생하는 온갖 돌발 변수에 대해서 함께 대처할 수 있다. 그렇게 함께 나눈 여행에 대한 기억은 잘 보관했다가 꺼내 쓰기 좋다. 우연히 들어갔다가 얻어걸린 맛집, 맛집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실망했던 식당, 길을 잃어 서로를 잃어버릴 뻔했던 사연, 가고 싶은 곳이 달라 싸웠던 날. 여행의 한 장면을 얘기하고 맞장구를 치는 순간 또 다른 정이 쌓이다. 관계와 여행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런 감정의 소비가 소모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즉 그 자체가 스트레스라고 생각한다면 혼자 여행을 가는 게 맞을 테다. 하지만 나 홀로 여행에는 갈등을 통한 성장이 없다. 배려도 없다. 추억 역시 나 혼자만의 것이다. 나눌 수가 없다. 성장과 나눔이 있어야 완벽한 여행이다. 그러려면, 함께할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둘째, 미련이 남아야 한다.

완벽한 여행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짜인 계획과 빈틈없는 실행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갑자기 펼쳐진 상황에서 의도치 않게 주어진 보석 같은 순간, 그 안에서 느낀 짜릿한 쾌감.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 가보지 못해 아쉬운 곳도 있어야 하고 만나지 못해 안타까운 인연도 있어야 한다.

2015년 미국 여행 때 우리 부부는 모뉴먼트 밸리를 꼭 가보고 싶었다. 빡빡한 일정에 구겨 넣어 숙소도 예약했다. 하지만 모두에게 무리라고 생각되어서 포기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리라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실컷 둘러보지 못한 팜스프링스 아웃렛은 "내 이번 생애에 기필코 다시 꼭 가보리라!" 하며 이를 갈게 만들었다. 가봐야 뭐 별거 있겠는가마는, 아쉬움으로 점철된 여행이야말로 연쇄적인 여행욕을 불러일으키는 동기임에는 틀림없다.

지난 미국 가족여행에 빠진 사람이 있다. 동생의 남편, 나의 제부인데, 자영업을 하느라 열흘간 문을 닫을 수 없어 홀로 한국을 지켜야 했다. 그 아쉬움 때문에 다음 여행에는 꼭 함께 추억을 쌓자고 약속했다. 장소든 사람이든 미련이 남아야 여행이 계속된다. 다음을 기약해야 완벽한 여행이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끝나는 여행.


마지막으로, 돌아갈 일상이 있어야 한다.

여행에서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은 언제나 집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삶의 모든 숙제를 잊고 여행에만 몰입하던 순간에서 벗어나 내일 낼 공과금을 챙기고 카드 결제일을 맞이해야 하는 삶. 여행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빨래로 보내야 하는 며칠. 여유롭게 조식을 즐기는 아침이 아니라 출근과 등교를 해야 하는 정신없는 아침이 기다리는 곳. 예전에는 그런 일상이 여행의 여운을 와장창 깨버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여행도 일상도 파괴된 지금, 완벽한 여행이란 돌아갈 일상이 굳건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들로 채워진 그곳이 있는 것.

"어서 와, 여행은 끝났어.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쳇바퀴 같은 삶을!"

이렇게 사악한 멘트를 던져도 좋으니 그저 떠나기 전과 같은 오늘이 있어야 완벽한 여행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약간의 아쉬움, 미련을 남긴 채,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2015년의 가족여행은...

따라서 가장 완벽한 여행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사촌동생의 흥겨운 결혼식장에서 남편은 난데없는 눈물을 흘렸다. 이유를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너무 행복해서~"였다.

반년 동안 성실하게 여행을 준비한 사람. 열흘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쉼 없는 배려를 한 사람. 물리적 한계로 스케줄을 조정하며 아쉬웠을 사람. 여행의 끝에 맞이한 결혼식에서 행복해하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가슴 꽉 차는 무언가를 느낀 사람. 그에게도 이번 여행은 완벽했으리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흔한 만남도 제한되고 일상마저 흔들려버린 2020년 현재.

완벽한 여행을 꿈꿀 수 있어서 행복한 열흘이었다.

다음 여행이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다.

다만, 너무 멀리 있지 않기를...

너무 늦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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