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8일, 제34회 공인중개사 국가자격시험이 있었다. 작년 시험에서 1차에 합격한 남편은 올해 2차 시험에 응시했다. 6월에 가맹거래사 시험을 치르고 난 직후부터 2차 시험을 준비했으니 4개월 동안 공부를 한 셈이며 출근 전, 퇴근 후, 주말을 이용했으니 절대적인 공부 시간은 100시간 남짓일 듯하다. 자식 노릇, 남편 노릇, 아빠 노릇도 소홀할 수 없고 회사일에 지장을 줄 수도 없던 그는 늘 종종거리며 공부했다.
시험 종료시간은 5시였는데 남편에게서 4시 반에 전화가 왔다.
"나 금메달 땄어!"
"잘 봤다는 얘기야?"
"1등으로 시험장을 나왔다는 소리야. 아... 망한 것 같아."
허탈해하는 그의 말에 어쭙잖은 위로나 잘 될 거라는 영혼 없는 응원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이제 끝났으니 당분간 실컷 놀아. 지난 4년간 공부만 했잖아! 있는 부동산들도 다 문 닫고 있대. 부동산 차릴 것도 아닌데 떨어지면 어때~"
남편은 애써 태연해하며 밝게 답했다.
"일빠로 나오니 좋네. 차가 붐비지 않아서 빨리 나갈 수 있겠어. 시험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주차할 때 너무 붐벼서 빠듯하게 시험장 들어갔다니까?"
집에 온 남편은 가답안이 나오기 전까지의 몇 시간 동안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가답안이 올라오고 혼자만의 채점시간을 가진 남편은 그제야 말문이 터졌다.
"너무 신기해. 긴가민가했던 문제를 다 맞혔어. 초반부터 엄청 꼬인다 싶었는데... 시험장에서 우리 줄 책상만 엄청 좁고 불편했거든. 가지고 갔던 수정 테이프도 갑자기 안 돼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코로나 시작과 동시에 시작한 남편의 국가자격증 시험 도전. 그 대단원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외식업에 종사하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경영지도사, 가맹거래사,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도장 깨기 하듯 하나씩 손에 거뭐진 남편. 그의 꿈은 500억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 꿈을 꿔야 죽기 직전까지 열심히 살 것 같다고 했다. 과거에는 큰 고깃집을 차리는 것이 목표였는데, 그 꿈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거니와 이루는 순간 다음날 죽을 것 같다며 목표를 더 높게 수정했다.
남편의 또 다른 꿈은 자식들을 재벌 2세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제 꿈은 재벌 2세인데 아빠가 노력을 안 해요~"라던 개그 프로의 대사를 들은 남편은, "우리 집은 아빠가 노력해 볼게~"라고 말했다. 말로만 끝날 줄 알았는데, 남편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노력 중이다. 공인중개사 시험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도서관을 향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변변한 기출문제집이 안보였다며 직접 가맹 거래사 수험서 집필을 하겠다고 했다.
"얘들아. 아빠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했다? 진짜 신기하지? 이제 또 책을 쓰겠다고 도서관에 가셨어. 이렇게 공부에 소질, 재능이 있을 줄이야.... 내년에는 수능을 보게 해서 의대 보낼까 봐. 로스쿨을 보내던가.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줘. 아빠가 백방으로 노력 중이니까 조만간 너희가 재벌 2세가 되는 날도 올 것 같아. 저러다가 어디서 뭐 하나는 터지겠지."
엄마의 말이 농담인 줄은 알면서도 아들들은 내심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은 기존의 부정적인 재벌 개념과는 다른 재벌이 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까지 했다.
남편과 아들들은 모르겠지만, 남편은 이런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감상적인 표현을 싫어하지만, 이미 그들은 재벌이다. 마음속 가득 부푼 꿈을 안고 일분일초 쉼 없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남편,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는 아들들. 그들이 재벌이라고 믿는다. 덩달아 나는, 재벌가 사모님이다. 재벌이라는 용어를, '여러 개의 기업을 거느리며 막강한 재력과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 무리'라는 사전적 정의 대신 '여러 개의 꿈을 갖고 막강한 추진력과 거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열정가 무리'라고 정의한다면 말이다. 여러분의 자녀도 재벌 2세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