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Nov 18. 2023

좋은 가족력은 없을까

방한한 미국 식구들을 챙기느라 힘들었던 아버지의 입술이 부르텄다. 조금만 피곤해도 입술에 포진이 생기는 분인데 이번에는 꽤 심하게 부풀었다. 아버지보다 세 살 많은 큰고모는 당신도 입술 포진이 잘 생기는데 그것도 가족력인가 보다며 씁쓸해하셨다. 


가족력이란, 치료에 이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알아보는 환자의 가족, 가까운 친척, 같이 사는 사람들의 의학적 내력을 말한다. 건강 상태와 앓은 병, 유전병, 사망 원인이 이에 해당한다. 암, 심혈관질환, 당뇨 등의 원인을 설명할 때 끌어들이게 되니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될 수밖에 없는 용어다. 

가족력은 유전적 유사성 외에 생활습관, 식습관, 주거환경등의 환경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유전적으로도 비슷한데 오랜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세제를 쓴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비슷한 질병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자 두려운 전개다. 어머니로부터 유방암 관련 유전자를 물려받아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라는 예측 때문에 유방절제술을 받은 안젤리나 졸리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감기에 걸려 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잦았고 결국 초등학교 때 편도 절제술을 받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렸다. 나와는 달리 삐쩍 마르고 핏기 없는 얼굴의 동생은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안 좋은 것을 많이 물려받았다. 어머니를 닮아 관절염이 생겼다. 손이 늘 시리고 마디마디가 아프단다. 어머니는 40대에 자궁암에 걸려 적출술을 받으셨는데, 동생도 자궁이 안 좋아 몇 년 전 적출을 해야 했다. 환절기마다 코를 훌쩍이는 아버지를 닮아 동생도 비염, 감기를 달고 산다. 아버지는 몇 년 전 위 점막하 종양이 발견돼 시술을 받으셨는데, 동생도 얼마 전 같은 것이 발견돼 시술을 받았다. 

"언니. 내가 엄마아빠의 안 좋은 거 다 받았으니 언니라도 건강하게 살아~"라며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는 동생에게, "이제부터는 내가 다 받을 테니 너는 그만 아퍼라..."라고 답하는 나다. 


가족력의 의미를 상담학 관점에서 보면, 개인이 어떤 가정환경에서 길러졌는지 알기 위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 가족력이다. 가족구성(부모의 연령이나 직업, 학력, 형제의 유무, 기타 동거자의 유무)을 비롯해서 부모의 성격, 부모의 성장 내력, 양육태도, 부부관계, 부모 각각의 양친과의 관계 등도 중요한 정보가 된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족력 [family history, 家族歷] (상담학 사전)> 


살면서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가족력이 무서웠다. 아버지의 고집스러움, 무뚝뚝함과 어머니의 안달복달, 전전긍긍, 오지랖을 동생과 나는 끔찍하게 싫어했다.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에서 불쑥불쑥 아버지 어머니가 튀어나왔다. 안젤리나 졸리처럼 미리 잘라버릴 수 있다면 좋겠건만 그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왔다. 두 분의 개성이 충돌하면서 만드는 갈등, 분쟁에 진저리가 나기도 했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면서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동생과 나는 서로에게 다짐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면 서로 꼭 얘기해 주기!!! 얘기해 주면 각성하기!!!"

내가 알지 못하는 가족력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달고 살아가는 많은 것 중에 가족력인 것과 가족력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나쁜 게 많을까 좋은 게 많을까. 끊어낼 수 있을까... 늘 고민거리였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자식이니까 부모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전제부터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대목이었다. 흰머리가 내려앉고 머리숱이 줄어들고, 허리가 점점 굽어가고 걸음걸이가 예전 같지 않은 두 노인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우리에게 준 것이 지긋지긋한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긍정적인 가족력도 많았음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동생은 아버지의 꼼꼼한 성격, 길쭉길쭉한 팔다리와 날씬한 몸매, 이과적 두뇌, 우직하고 진중하고 성실한 태도를 물려받았다. 나는 어머니의 맨질맨질한 피부, 오지랖으로 발현되는 정, 감성,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성격을 물려받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가족력인지, 어떤 것을 얼마만큼 물려받았는지를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을 통해 이 땅에 존재하고 숨 쉬고 매일을 살아나가는 것, 그 이어지는 역사가 가족력이 아닐까. 그런 의미라면 가족력은 내내 좋은 것일 수밖에... 






매거진의 이전글 작전명 : K간식을 사수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