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Nov 16. 2023

작전명 : K간식을 사수하라

미국에서 사촌오빠네 식구들이 온 것은 2주 전이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여 외교부와 미국 국무부가 개최한 한미우주포럼에 미국 정부기관 소속으로 참석하게 된 사촌오빠가 가족들과 함께 방한한 것이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오빠를 비롯해 브라질 출신 아내와 딸 셋 모두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다행히 큰고모도 함께 오셨지만 매번 통역을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 서울투어 하루와 부산 투어 3일을 동행하는 동안 내 영어능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던 한국음식 맛을 기억하는 오빠와, 할머니 덕에 한국음식에 익숙해진 오빠네 식구들은 뭐든지 잘 먹었다. 특히 수원의 유명 갈빗집에서 가졌던 가족모임에서는 연신 "Amazing~"을 외쳤다. 첫 방문이자 다음을 기약하기 힘든 이번 여행을 위해 오빠의 외가 식구인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먹는 것에서부터 자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기억할 때 조금의 아쉬움도 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부산에 가고 싶다는 오빠를 위해 아버지는 11인승 승합차를 렌트하셨다. 남편은 아껴두었던 휴가를 썼다. 나는 자원봉사를 다른 선생님께 부탁했고, 조정하기 힘든 수업 때문에 기차를 이용해 따로 부산에 내려갔다. 어머니는, 여행 내내 먹을 간식과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어머니는... 가족들 먹거리에 진심인 사람이다. 여행을 갈 때 절대 빈손으로 가는 법이 없다. "간단히 먹을 아침 거리랑 차에서 오가며 먹을 주전부리를 좀 챙겼어. 조금이야."라고 하지만 절대 간단하지 않고 절대 조금이 아니다. 8년 전 미국 여행을 갔을 때도, 어머니는 열명이 열흘동안 먹을 아침과 간식을 챙겨갔다. 우리는 아침마다 누룽밥과 젓갈을 먹을 수 있었고, 끝이 안 보이는 서부 사막 한가운데를 달리는 차속에서 잘 구워 압축포장해 온 K 쥐포와 K 오징어를 씹을 수 있었다. 뭔가 모자란다 싶을 땐 틈틈이 마트에서 산 빵과 베이컨, 계란으로 숙소에서 아침상을 차려냈다.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 거들어야 하는 일이 나는 싫었다.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것도 싫었다.


이번 부산 여행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조금만 챙기라고 당부했지만 한 번 커진 어머니의 손은 작아지지 않았다. 2박 3일 여행 내내 먹을 과일과 과자, 아침식사로 먹을 빵은 기본이고 딸기잼에 크림치즈까지 챙겼다. 아버지가 직접 키운 청계가 낳은 달걀도 삶아갔다. 미국 식구들에게 한국에 오자마자 삶아줬더니 "마시써요~~"라며 엄지 척을 날렸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커피에도 진심인 어머니는 드립커피 도구와 원두까지 챙겼다. 그것도 모자라 후발대로 합류하는 나에게 누룽지와 컵라면 좀 챙겨 오라고 주문했다. 엄마를 닮아버린 나는 누룽지를 챙기는 김에 보리굴비까지 챙기고 말았다. 어머니 덕분에 이틀의 아침 식사가 풍성하게 차려졌다.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서기 직전, 어머니가 가장 분주해지는 시간이다. 하루종일 돌아다닐 식구들이 먹을 간식을 챙기는 것이다. 숙소에서 고구마까지 찌는 사람. 바로 우리 엄마다. 나는 그게 참 싫다. 그 분주함, 번잡스러움이 불편하다. 여행의 백미는 현지 음식, 길거리 간식을 사 먹는 것이 아니던가. 늘 먹던 고구마를 거기서까지 쪄서 먹어야 하는지, 집에서부터 들고 간 과자를 꼭 먹어야 하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곳곳에서 엄마의 간식 가스라이팅이 더해지면 이내 짜증이 올라왔다.


음료수를 사 먹으려 할 때면 어디선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마르지? 귤 좀 먹을래? 난 목마를 때 음료수보다 과일이 좋더라?"

과자를 사려고 하면,

"차에 과자 있어. 그거 먹어. 여기는 너무 비싸다."

호두과자 노상 앞에서 꾸물대면,

"그게 뭐 맛있니? 순~ 달기만 하지. 호두도 안 들어있을걸?"

커피를 사려고 하면,

"아침에 내린 거 마후병(보온병의 엄마식 표현)에 넣어 왔는데, 그거 먹지 그래?"


다른 가족들은 순응하지만 난 성격이 못돼서 반드시 저항을 하고 만다. 이번 여행에서도 그랬다. 민주투사라도 된 것처럼 '나를 따르라!'는 눈짓을 보내며 그들의 간식 행군에 길을 터주었다. 호두과자도 몰래 사주고 커피도 사줬다. 미국 민중들은 국제시장과 자갈치 시장, 집으로 가는 휴게소에서 억눌렸던 K간식욕을 불태웠다.

한 입씩만, 아니 한 마리씩만 겨우 삼키고 "Disgusting~"하며 물을 마셔야 했던 번데기를 사 먹었다. 나머지는 번데기 킬러인 남편이 "yummy~~"하며 해치웠다. 어머니가 먼발치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어휴.. 먹지도 못하는 걸 왜 사서는..." 하며 우리를 지켜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갓 튀겨 뜨끈 바삭하고 설탕을 뿌려 달달한 찹쌀 도넛도 사 먹었다. "Umm~~~ So delicious!"라며 하나씩 들고 먹는 식구들을 봤다면 어머니는 분명 그랬을 거다. "아침에 그렇게 빵을 먹고 도넛을 또 사 먹어? 어휴... 깨끗한 기름에 튀긴 것도 아닐 텐데... "

프렌치 프라이처럼 생겨 자극적인 시즈닝을 입힌 쫀드기도 미국 식구들은 좋아했다. "어휴... 그런 걸 무슨 맛으로 먹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최대한 몰래 사줬다.

32cm나 된다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차에 올라탄 아이들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이스크림을 대신해 당신이 줄 수 있는 간식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앙다문 입만 삐죽거렸다.


미국 식구들이 고속도로 휴게소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슬쩍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혹여라도 엄마가 들이닥치면 문 앞에서 저지할 계획이었다. 사촌오빠는 열심히 구경하다가 처음 보는 생강과자를 사서 맛있게 먹었다. 조카들은 새우깡 큰 봉지를 두 개나 사서 실컷 먹었다. 어머니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가방에서 빼빼로와 초코찰떡쿠키를 꺼내 호객행위를 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쪘던 고구마를 꺼냈을 때는 다행히 고모가 반씩 나눠먹자며 호의를 보였다. 나는 어머니가 권하는 어떠한 간식도 먹지 않는 것으로 저항을 이어나갔다. 못되고 못난 딸이다.


출국날이었던 오늘.

어머니는 미국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점심밥을 차려주고 싶다며 아침부터 분주했다. 전을 부치고 낙지볶음과 불고기를 차려냈다. 미리 담가두어 알맞게 익은 백김치도 꺼냈다. 정갈하게 차린 밥상은 K 할머니의 정성과 인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어머니의 그 정성과 인심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식사를 하며 미국 식구들은 한국에서 먹었던 다양한 길거리 간식 이야기를 했다. 떡볶이, 어묵, 순대, 쫀드기, 닭꼬치, 훈제오징어, 호두과자, 번데기, 떡, 빈대떡, 찹쌀도넛등을 먹었는데 못 먹어서 아쉬운 간식이 있다고 했다. 몇 번 살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다는 그것은 붕어빵이었다.

"다음에 와서 먹으면 되지 뭐~"라는 고모와 "그래~ 지난번에 먹은 호두과자랑 맛도 비슷해~"라는 어머니의 말에 나는 순간 쓸데없는 의협심이 발동했다. 마침 근처에서 오고 있다는 동생에게 서둘러 문자를 넣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동생은 두 손 가득 붕어빵을 사 왔다. 비가 와서 길거리 붕어빵 집이 모두 문을 닫아 대형 마트에서 사 왔다는 오리지널과 슈크림 붕어빵. 비록 크기는 작았지만 사촌오빠네 식구들은 감동하며 동생에게 고마워했다.


엄마는... 항복했다.

붕어빵은 겉이 바삭해야 맛있다며 에어프라이어에 살짝 돌려 겉바속촉한 붕어빵으로 만들어주었다. 식구들은 겉에 얇게 달려있는 과자부터 조심스럽게, 맛있게 먹었다. 그들을 위해 몰래 작전을 펼치듯 간식을 샀던 내가 어머니는 여전히 못마땅하겠지만, 임무를 마친 나는 홀가분하다.


숙소에서 익어가는 고구마...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갑분글감

매거진의 이전글 그것은 최선이 아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