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Nov 21. 2023

당첨되면 안 되는 복권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두꺼운 패딩을 입고 길을 나서던 남편이 현관 앞에서 유턴을 했다.

"주머니에 이게 있다?" 하면서 보여준 것은 천 원짜리 즉석복권 다섯 장이었다. 이리저리 살피는데 판매기한과 지급기한이 눈에 들어왔다.

판매기한 2022년 6월 30일

지급기한 2023년 6월 30일


매년 겨울이 끝나면 두꺼운 옷들을 세탁소에 맡긴다. 판매기한2022년까지인 복권이라면 적어도 두 번의 겨울을 패딩 속에 있었다는 말인데,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야 워낙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라 주머니를 살피지 않고 세탁소에 맡겼다 해도, 주머니 속 낡은 명함 하나까지도 챙겨주시는 세탁소 사장님이 놓쳤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아무튼, 남편과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복권을 긁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지급기한이 지나버린 복권이다. 만일 최대 상금인 5억에 당첨된다면 눈앞에서 5억이 단숨에 날아가는 장면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며칠은, 아니 한 달은 자다가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 그러자고 안 긁자니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기한을 넘겼더라도 '긁지 않은 복권'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 설렘이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긁어... 볼까?"라는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남편의 손에는 500원짜리 동전이 들려있었다.


까짓것 긁어보자고 결심한 데는 근거가 있다. 눈앞에서 일확천금을 놓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남편이 흥분하거나 잠을 못 자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남편은 로또 3등 당첨에 대한 공포를 말하곤 했다.

"3등은 안 되는 게 나을 것 같아. 잠이 안 올 것 같거든. 숫자 하나만 더 맞았다면 1등인데 그 하나를 못 맞혀서 3등이 되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 차라리... 안 되는 게 낫겠어."

그런데 올해 초, 남편이 산 복권이 3등에 당첨됐다. 기껏해야 5천 원인 5등에 당첨되거나 운이 좋으면 5만 원인 4등에 당첨되는 것이 다였는데 당첨금이 150여만 원인 3등에 당첨된 것이다. 로또가 생긴 이후 꾸준히 사 온 남편도, 매주 몇 만 원씩 사는 남편 친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주변에서 3등에 당첨된 사람을 본 적도 없었다. 그 흔치 않은 일을 남편이 해낸 것이다. 올해부터 3등까지는 세금도 떼지 않고 은행에서 바로 지급한다고 했다. 실수령액 1,545,870원. 남편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첨된 복권을 나에게 주었다.

"난, 3등 당첨되면 엄청 속상하고 잠도 안 올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냥 기쁘기만 하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3등이 어디냐 싶은 거 있지? 두 아들의 대학 등록금 내느라 가계 살림이 빠듯할 때 이렇게 숨통을 열어주네."


우리 준열이 다 컸네, 사람 됐네 하며 농을 던졌지만 내가 알던 남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경제관념이 없고 안일한 나와는 달리 걱정이 많고 조바심 내던 남편이 아니었던가. 숫자 하나면 더 맞았다면 십수억 대 당첨금을 수령할 수 있었을 거라며 팔팔 뛸 줄 알았는데 십수억과 150만 원의 차이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다니. 이런 걸 성숙, 성장이라고 해야 할까? 득도? 해탈?



그 기억을 믿고, 의연해진 남편을 믿고 즉석복권을 긁기 시작했다. 차마 본인이 긁을 용기는 안 났는지 남편은 내 손에 500원 동전을 쥐어주고 옆에 지켜 섰다. "숫자부터 긁지 말고 당첨금부터 긁어봐!" "뒤에서부터 긁어봐!" 이런저런 요구사항이 많은 남편에게 "지금 뭐 영상 찍어? 왜 그렇게 가슴 졸리게 긁어보래!!!"라며 쏘아붙였다. 어쩌면 남편보다 내 심장이 더 벌렁거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5,000원.

다섯 장을 긁고 당첨된, 아니 당첨될 뻔했던 총금액은 5,000원이었다. 뭐 그 정도면 잠깐 스릴 있게 놀았다고 생각할만했다. 만일 5억이었다면? 남편은 차치하고 내가 잠이 안 왔을 것 같다. 긁지 말걸...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안 긁고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생의 수많은 고비, 굽이에서 주저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선택을 회피하고 싶었고 최대한 미루고 싶었던 적도 있다. 지나간 선택을 후회하는 일도 많았고 피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일단은 긁어봐야 한다. 가 봐야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보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무사함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도 느낀 것도 없다는 사실에 더 큰 아쉬움 남게 된다. 인생에 재미와 의미를 더하고 싶다면 일단 긁어봐야 한다. 당첨되면 안 되는 복권일지라도 긁으면서 쫄깃했다. 긁고 나니 글이 됐다.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가족력은 없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