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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Dec 03. 2023

멸치 똥 딸 시간

독감의 시작은 급똥이었다. 

안성의 한 대학에서 특강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여러 번의 고비를 간신히 참아가며 정신이 아득해지기 직전 대형마트를 발견해 아찔한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집에 오자마자 오한이 나기 시작했고 밤새 열이 올랐다. 그로부터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몸살과 목감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는 게 힘들었지만 약기운으로 버티고 수액을 맞아가면서 예정됐던 강의를 했고 교육자원봉사 연말 사례 나눔 행사 사회도 봤다. 


공식적인 일정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무조건 드러누워 잤다. 일주일 동안 밥도 안 했고 집안일에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온몸 뼈마디가 쑤시는데 빨래가 다 뭐란 말인가. 입맛이 하나 없어 먹고 싶은 것도 없는데 식구들 먹이자고 가쁜 숨 몰아쉬며 밥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두가 성인이 아니던가. 각자 끼니는 각자 해결하기로 했다. 밀린 드라마를 몰아서 볼 에너지도 없었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그렇게 잤는데도 밤이 되면 또 잠이 몰려왔다. 안 먹고 잠만 잤는데 꿈쩍도 안 하던 몸무게가 2킬로그램이나 빠졌다. 뜻밖의 감량에 아픈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의도적으로 모든 활동을 멈췄다. 의식적으로 나에게 깊은 휴식을 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할 권리를 찾았다. 하루 만보 걷기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불안함에서 해방됐다. 그렇게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고 안심을 시켰다. 


생각마저 정지했던 일주일을 편하게 쉬고 나서 회복한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2학기 강의, 봉사 일정이 모두 끝난 시점이라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시기, 미루었던 일이 뭐가 있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주전에 사놓고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국물멸치가 보였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하는 일이 멸치 똥 따는 일이라니... 기왕 미뤄둔 거 더 미룬다고 어떻게 되는 일도 아닌데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서 한 박스를 다듬기 시작했다. 바쁘면 간편하게 나온 다시백을 사거나 동전모양 조미료를 사서 쓰면 될 것인데, 그건 또 싫어하는 지랄 맞은 성미라서 매번 멸치를 사서 일일이 머리와 내장을 떼고 팬에 한번 덖어 소분해 냉동실에 넣어둔다. 그걸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감사했다. 쌓여가는 똥을 보며 급똥을 해결했을 때만큼이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열심히 살아온 날에 대한 보상이 멸치 똥 딸 여유시간이라는 게 제법 멋지게 느껴졌다. 모든 게 다시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멸치 똥 따는 게 가장 시급한 과제인 지금도 괜찮다는 위안,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천천히 해결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는 깨달음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 한 줄 요약 : 넘어진 김에 푹 쉬어가도, 괜찮다.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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