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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Feb 05. 2024

기억을 기록했던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기분이 휑했다. 원래 뭐가 있었던 것 같은 자리에 그 뭐가 없어진 기분. 밖으로 뛰어나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을 다시 데리고 들어와 물었다. 뭔가 허전하지 않냐고, 이쪽 벽면에 걸려있던 액자 두 개가 사라지지 않았느냐고. 남편은 깜짝 놀라며 집에 누가 들어왔던 것 아니냐고 했고 나는 엉뚱하게도 1박 2일 여행을 간 아들을 의심했다. '집에 있는 물건 아무거나 집어 오기, 없어진 것을 제일 먼저 눈치채고 전화를 하는 집이 우승' 뭐 이런 게임을 하기 위해 들고나갔나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나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남편은, 내가 몇 달 전 치웠던 것 같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출근했다. 돌아가신 분의 사진을 집에 걸어두면 안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아버님과 함께 찍은 남편의 어렸을 적 가족사진, 고모부와 함께 찍은 친정가족사진을 치웠다는 것이다. 내가...

내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이럴 땐 나를 의심하는 게 제일 합리적이다.


거실 수납장 서랍을 열어보았다. 벽에 걸려있는 줄 알았던 액자와 사진이 얌전히 누워있다. 액자는 온데간데없고 사진만 남겨진 것도 있는 걸 보니, 언젠가 액자가 깨졌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치웠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기억에 전혀 없는 사건이고 전개다. 찝찝하다.



과거에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delete'를 눌러버린 일, 도무지 전후 사정을 알 길이 없는 일,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천연덕스럽게 발뺌해 버린 일, 쉽게 남을 의심해 버린 일.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더 많아질까? 기억력은 점점 안 좋아질 테고 고집은 더 세질 것이며 의심은 끝도 없이 커지지 않을까.


스러져가는 기억을 박제해 두고 고집의 쓸모없음을 인정하며 의심을 거두어 문제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나는 이미 안다. 기록이다. 사진을 찍고 음성으로 녹음해 순간을 가두어놓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들고 사는 이유가 그것 때문 아니겠는가.

물리적 공간에 가두어놓았던 기록에 숨을 불어넣어 열린 공간에 펼쳐놓는 방법도 나는 이미 안다. 글쓰기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을 붙잡아 글로 묶어두면 객관적인 실체뿐 아니라 순간의 감정과 심상까지도 남겨둘 수 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글을 읽으면 그 시간과 공간에 닿을 수 있게 된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는 엉뚱한 소리는 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계속 쓰고 볼일이다. 더 부지런하게...


그런데...

글을 썼다는 사실조차 잊으면 어쩌지?

이게 내가 쓴 글이라고?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내가 브런치작가였다고?

늘봄유정? 그게 나라고?


#라라크루 7기 출발

#라이트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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