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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Feb 08. 2024

백억 대 부자의 실체

내 휴대폰에 저장된 남편 이름은 '둘도, 셋도, 넷도'이다.

<당신의 의미>라는 곡에는 '당신 사랑하는 내 당신 둘도 없는 내 당신'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둘도'와 '없는' 사이에 '셋도, 넷도'를 추임새로 넣었던 것이 생각나 남편의 이름 대신 '둘도, 셋도, 넷도'를 썼다. 남편을 엄청나게 사랑해서가 아니다. 오래전 지인이 남편을 '연구 대상'으로 저장해 놓은 것에 영감을 받아, 당신이 도대체 어떤 놈인지 알고 싶다는 의미로 바꾼 이름이다. 


내 휴대폰 카톡에 저장된 남편 이름은 '백억 대 부자'다. 

아주 오래전, 경복궁 근처의 유명한 작명가가 남편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랬단다. 이삼백억 대 부자가 될 이름이라고. 작명가 본인이 지은 이름이니 좋은 이름이라고 해야 마땅할 테고 그 예언이 꼭 들어맞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철석같이 믿고 살고 있다. 상상만 해도 배가 부른 그 이름 '백억 대 부자'.


어차피 백억은 성실하게 모을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이 아니다. 그러니 돈의 쓰임을 마음껏 상상해도 무리가 아니지 않을까. 남편의 걱정은, 정작 본인은 그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어쩌냐는 것이다. 이삼백억이 생긴다면 꿈에 그리던 스포츠카를 꼭 사고야 말겠다는 야무진 계획도 세웠는데 그 차도 못 몰아보면 어쩌냐고... 상상은 자유, 망상은 해수욕장이라던 아버지의 농담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얼마 전, 설을 앞두고 시어머님과 지인을 찾아뵀다. 어머님의 먼 친척 되는 분인데 해마다 어머님에게 설 선물을 보내오시니 그냥 지나치기에 미안하다며 과일이라도 한 상자 들고 가자 하셨다. 지인은 지역에서 소문난 역술가다. 십수 년 전, 동생의 결혼을 심하게 반대하던 친정어머니를 따라간 곳이 그곳이었는데 알고 보니 시어머님의 먼 친척이었다. 세상 참 좁고 묘한 곳에서 인연이 닿는다. 


신년 운수를 보러 간 것은 아니었는데 장소가 장소요 직업이 직업이니 지인분은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 사주풀이를 해주셨다. 

"우리 아주머니는(나를 칭한다) 밖에 나가서 풀빵 장사를 해도 백억을 벌 팔자네. 남편분이 아주 잘해줘야겠어!"

"우리 큰 아드님이 아주 복덩이네 복덩이. 여기도 백억을 벌겠는데?"

남편과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로를 쳐다봤다. 나 백억, 아들이 백억, 도합 이백억????

그랬다. 남편 사주에 있다는 이백억의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사람 마음이 그렇다. 남편이 이삼백억 대 부자가 된다고 할 때는 그냥 좋았다. 남편 돈이니 이혼만 안 하면 나도 떡고물정도는 받을 수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내 사주에 백억이 있다고 하니 갑자기 어깨가 펴졌다. 평소 지인들과 커피 마시며 수다를 떨 때면 밖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백억 대 부자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당당해진다. 백억 대 부자 아내인데 이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하면서 나 자신에게 관대해진다. 반면에 남편은 살짝 실망한 눈치다. 백억 대 부자의 장본인에서 졸지에 백억 대 부자의 남편과 아버지가 됐으니... 그래도 차는 꼭 사달라고 조르고 있다. 


자신에게는 관대해지고 남에게는 너그러워진다. 신정 때 차례를 지냈지만 음력설 때도 모여 밥 한 끼는 먹어야 한다는 양가 어른들 때문에 잠시 심사가 꼬였지만, 금세 마음을 푼다. '백억 대 부자는 아무나 되나, 마음을 넓게 써야 그 정도 부자가 되지. 어른들께 잘하면 그 복 다 어디 가나? 나한테 오지. 암. 그렇고 말고.' 하면서 장을 본다. 


어머님의 지인은 유명세에 비해 아주 용한 역술가는 아니다. 

결혼시키면 아이도 못 낳고 금방 헤어질 거라던 동생은 아들, 딸 낳고 15년째 잘 살고 있다. 

5등급이지만 고대에 꼭 붙을 거니 속는 셈 치고 꼭 고대에 지원하라고 했던 큰아들은, 고대 세종캠퍼스도 떨어졌다. 하지만 이니셜은 같은 K대에 다니며 잘 살고 있다. 

맞춘 것 반, 못 맞춘 것 반이다. 


백억 대 부자의 꿈 역시 꿈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꾸는 것만으로도 꿈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복된 일을 놓치지 않을 계획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라고 놓은 덫일지라도 걸리고 말 테다. 백억이 있어도 한 푼도 못쓰고 죽으나, 백억을 한 푼도 못 벌고 죽으나 결과는 매한가지지만 전자라고 상상하면 내내 삶이 즐거워질 것 같다. 어쨌든 난 백억 대 부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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