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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r 15. 2024

박살난 자동차

< 라라크루 갑분글감 - 자동차 >

"여보세요? OOOO 차주 되시죠?"

주말 오전 여덟 시를 갓 넘긴 시간에 걸려 오는 이런 전화는 결코 좋은 내용일 리 없다. 주차된 차를 살짝 긁었다고 이실직고하거나 실내등이 켜져 있으니 빨리 끄라고 알려주는 등 친절한 이웃들의 전화일 테지만 조용하던 아침 시간에 파란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간혹 1층에 세워두게 되면 이사를 위해 사다리차가 진입해야 한다며 차를 빼달라는 전화를 받을 수도 있다. 이래저래 달갑지 않다. 


그날도 그랬다.

토요일 아침, 차주를 묻는 전화 저편 남성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잠깐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다는 대목에서 이미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직접 내려가 확인한 차의 상태는, 오마이갓이었다. 차량의 왼쪽 뒤 범퍼가 부서져, 아니 아작이 나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어떻게 돌진하면 이렇게 박살을 낼 수 있을지, 나로서는 그 속도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무조건 자기 잘못'을 인정한 차주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확실한 사후 처리를 약속했다. 대차부터 수리까지 걱정 마시라고 했다. 


소식을 듣고 도서관에 갔던 남편이 달려왔다. 여러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밤 12시가 넘어 사고를 냈다고 했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블랙박스는 오전 7시 30분 이후부터만 녹화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1층 도로에 주차해 놓은 것은 나의 잘못인데 주차해 놓은 차를 받은 자기 잘못만 순순히 인정하는 부분도 마뜩잖았다.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나 싶었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 남편이 상대 차주에게 저쪽 가서 담배나 하나 피우자고 제안했다. 숨겨진 비밀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경찰을 불러야 하나 고민했다. 음주 운전은 명백한 범죄이니 말이다. 아파트 후문에서 대리기사를 보내고 주차만 하려다가 이런 사고를 냈다고 하는 상대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는 것이 맞는지, 같은 아파트 주민끼리 얼굴 붉힐 일 만들지 않는 게 좋지 않냐는 남편의 말대로 하는 게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와 원팀이 되어 가해자를 압박해야 하는 남편이 어느 순간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 나를 설득하는 것 같은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주말 아침, 혼란스러운 일을 빠르고 간단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마음에 우리끼리 해결하는 방법으로 결정했다. 


1년 전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러 후회가 남아 있다.

술 먹을 일이 있는 약속에는 차를 갖고 가지 않는 나인데, 그날은 술을 마시고 대리를 부른 것.

대리 기사가 주차 자리를 헤매는 것이 불편해 그냥 1층 도로에 주차하고 가시라 한 것. 

아침 일찍 차를 주차장에 넣으려 했는데 이불에서 1분만 더를 외치며 뭉그적거린 것. 

상대방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고 느꼈지만, 적극적으로 추궁하지 않은 것. 

아파트 단지 내 사고라는 이유로 경찰을 불러 사고처리를 하지 않은 것. 

걸리는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흘렀다. 훼손됐던 차량은 복구된 지 오래이며, 그날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힐 길은 없다. 어떤 일은 그저 그때의 내가 한 결정이 최선이었다며 묻어야 할 때가 있다. 그날, 모든 정황은 그럴 수밖에 없었으며 다시 돌아간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박살 난 자동차를 봐야 하는 씁쓸함보다 깔끔하지 못했던 일 처리에 대한 씁쓸함이 더 컸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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