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12일, 영국 정보부 출신으로 스파이 소설을 본격적으로 문학적 궤도에 올린 존 르 카레(John le Carre)가 타계했다. 사인은 폐렴. 그의 나이 89세. 존 르 카레는 필명이고 데이비드 존 뮤어 콘월(David John Moore Cornwell)이 본명이다.
1931년 잉글랜드 도싯(Dorset) 주의 항구도시 풀(Poole)에서 출생한 르 카레는 사기꾼으로 감옥을 드나든 아버지와 자식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쫓아 가출한 어머니, 그리고 교도소에서 나온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가족 배경 등으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도싯의 셔본(Sherborne)에 있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에는 스위스로 건너가 베른 대학교에서 언어에 대한 흥미를 발판으로 독일어와 문학을 전공하였고 영국으로 돌아와 1956년 현대 언어학 전공으로 옥스퍼드 대학의 링컨 컬리지를 우등으로 졸업한다. 대학 졸업 후 1958년까지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에서 잠시 독일어를 가르쳤는데 이때 영국 교육제도가 사회적으로 부적절하다는 회의를 느낀다.
스위스에서 배운 유창한 독일어와 옥스퍼드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르 카레는 자연스럽게 어학 인재를 찾고 있던 영국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정보기관에 채용된 르 카레는 1959~1964년 기간 ‘제임스 본드(James Bond)’로 유명한 영국 비밀정보부(MI6)에서 일하며 냉전 기간 자신의 모국 영국을 위해 비밀스러운 첩보활동을 수행한다.
군 복무 기간에 오스트리아 주둔 영국군의 정보장교로 활동한 이력과 본인은 부인하지만 미국의 뉴스위크(Newsweek) 잡지가 밝혀 보도한 영국 보안정보국(MI5) 소속의 비밀요원으로 유럽에서 활동한 젊은 시절의 경험은 그의 머릿속 깊이 자리하게 된다.
비밀정보요원으로 독일의 베를린 장벽을 둘러싸고 벌이는 생사를 건 치열한 첩보활동, 냉전 기간 비현실적이랄 만큼 현실적인 영국과 러시아 간 수많은 이중간첩 사건, 해럴드 맥밀란(Harold Macmillan) 총리의 퇴진을 가져온 ‘프로퓨모 스캔들’ 같은 긴장감 넘치는 스파이 활동에 대한 관찰과 다양한 경험은 르 카레 스파이 소설의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르 카레는 현역 시절에 런던 북부 버킹엄 셔(Buckinghamshire)에 있는 자택에서 직장인 런던의 보안정보국으로 출퇴근하는 기차 안에서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61년에 첫 번째 첩보물인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가 출간되었고, 이듬해에는 두 번째 작품 《고귀한 살인》을 출간한다.
1963년에는 세 번째 작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가 발표되었는데, 그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작가로 주목을 받게 된다. 평론가들은 이 스파이 소설이 이언 플레밍(Ian L. Fleming)이 탄생시킨 ‘제임스 본드’ 소설에 대한 한층 성숙한 응답이 될 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소설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문필 생활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자 그는 비밀정보부를 나와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작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두고 “자신이 읽어 온 스파이 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작가 톰 울프(Tom Wolfe)도 “르 카레는 뛰어난 이야기꾼 이상의 존재이며, 그의 소설은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라고 호평했다.
르 카레는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발표한 이래 40여 년 동안 《겨울 나라의 전쟁》,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북 치는 소녀》, 《완벽한 스파이》, 《러시아 하우스》, 《나이트 매니저》, 《파나마의 재단사》, 《성실한 정원사》, 《모스트 원티드 맨》, 《우리들의 반역자》, 《민감한 진실》, 《스파이의 전설》 등 25편의 스파이 소설을 발표했으며 타계하기 1년 전인 2019년 88세의 나이까지 집필을 계속했다.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 36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세계적인 독자층을 갖게 되었으며 대부분 작품들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영화나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그의 작품은 냉혹한 첩보활동 속에서 스파이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세밀한 묘사를 통해 박진감 있게 흥미로운 전개를 해 나가는 것으로 정평이 있다. 특별히 르 카레는 스파이 세계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을 단지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고 인간적 본성과 감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담담하고 솔직하게 묘사하는 필력으로 유명하다.
르 카레는 스파이 세계의 비정함에 대해서도 인간적 감성에 기반한 솔직한 심경을 작품 속에서 토로하곤 했다. 처절한 냉소주의, 현실정치와 첩보 세계의 도덕적 진공 상태. 이성이 지배하는 도덕률 사회에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 등 그는 치열한 국익 활동에서 드러나곤 하는 스파이들의 잔혹하고 냉정한 현실을 음울하면서도 감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첩보활동은 사실 신사들의 게임은 아니다. 게다가 확실성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음습하고 캄캄한 늪지 속에서 전개되는 스파이 활동을 누구도 대신할 수는 없다. 르 카레는 평범의 옷을 입고는 좀처럼 견뎌내기 쉽지 않은 스파이 세계의 현실을 마치 구름 위에서 손을 내젓듯이 무덤덤하게 고백한다.
“우리가 불쾌한 일을 하는 것은 동서 양쪽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밤에 침대에서 안전하게 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지나치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때로는 아주 못된 짓도 하지. 도덕성을 비교 평가하면, 우리는 비교적 부정직한 일에 종사하고 있네. 어쨌든 한쪽의 관념을 다른 쪽의 방법과 비교할 수는 없지. 그렇지 않은가?”
르 카레는 첩보작전은 도덕이 결여되어 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정치적 신조를 지탱하는 도덕적 원칙에 봉사해야 하는 스파이들의 숙명이 자리하고 있다는 현실을 함부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목적이 개인의 감정보다 우선하며,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해준다는 스파이 세계의 불문율에 저항하며 도덕적 성실성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작품은 때로는 전후 미국의 패권주의의 폐해는 물론 영국 사회의 불평등을 고발하는 혹독한 비판의 책이 되었다. 르 카레로 하여금 그런 열정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든 것은 ‘개인이 집단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 있다는 기독교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윤리관’이었는데, 작품들에서 풍겨 나는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인류의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며 인본주의적인 여론을 형성”한 공로는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의 몫이 되었다.
그는 자유와 민주, 그리고 사회적 정의의 가치를 일생을 통해 신봉했다. 그런 까닭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충돌에 대해서도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며 팔레스타인을 지지했고 아라파트 의장과도 흉금을 터놓고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구소련 KGB 수뇌부들과도 대담을 하는 등 객관적이고 균형을 갖춘 사고의 바탕에서 냉전기간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첩보전쟁의 본질을 추적하고 그 안에서 스파이들의 인간적 고뇌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미국 CIA의 책임자들과 영국 정보부의 고위 관리들은 그를 유쾌하지 않은 상대로 인식하였고 그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도 인색했다.
많은 영국 국민들이 셰익스피어를 사랑하지만 찰스 디킨슨을 존경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듯이 귀족 체제의 전통, 권력자들의 권위주의, 부유층의 경제독점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르 카레의 몫이었고, 이런 현실을 작품을 통해 꾸준히 고발하는 르 카레에 대한 영국민들의 사랑은 특별했다.
이런 연유로 평론가 존 할퍼린(John Halperin)은 “르 카레는 오늘날 스파이 스릴러를 쓰면서도 본격 작가로 대접받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하였고 수많은 비평가들이 르 카레의 작품세계에 대해 존경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르 카레의 초기 작품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첩보요원 ‘조지 스마일리(George Smiley)’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정은 ‘셜록 홈스(Sherlock Holmes)’ 못지않아 그들을 실존 인물로 착각하는 다소 구세대인 빅토리아 시대의 시민들이 홈스의 주소인 ‘베이커 스트리트 221B’로 편지를 보내는 반면, 현대 영국인들은 스마일 리의 집주소인 ‘첼시 바이워터 스트리트 9번지’로 편지를 보내 자신들의 고민을 상담하거나 어려운 문제의 해결을 요청하기도 한다.
영국은 ‘제국’ 운영의 경험과 제1, 2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하고 전후에도 미국과 연대해서 구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에 직접 대응하면서 군사적 대립의 최전선에 있었다. 한편 군사적 대립 못지않게 국익을 위한 외교적 노력과 첨예한 첩보활동이 필요했는데 르 카레나 이언 플레밍 등 많은 스파이 소설 작가와 작품에 등장하는 첩보 세계의 배경은 따라서 그들에게는 낯선 문화가 아니다.
르 카레가 탄생시킨 많은 인물들, 앨릭 리머스, 카를 리메크, 리즈 골드, 피터 길럼, 조지 스마일리,.. 그가 천상에서 그들과 함께 잉글리시 티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영면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