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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Oct 10. 2021

이른 새벽의 공정함 타령


유학시절을 생각해보면 사회과학인 정치학과 인문학인 역사학을 복수 전공한 탓에 인문학적 관점과 사회과학적 탐구의 접근방식 속에서 조금 혼란스럽긴 했지만 다양한 과목을 다양한 국가에서 온 젊은 친구들과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나름 큰 즐거움이었다. 


영국의 학부과정은 의학이나 해당 국가에서 현지 언어를 공부하며 지역 연구를 하는 언어학 전공과 기업에서 인턴과정 기간 1년을 실습하는 경영학 같은 특정학과를 빼고는 기간이 3년이어서 늘 빠듯한 시간 속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나는 정치학 과목에서는 《영국 정치학》, 《비교정치학》, 《정치사상》, 《러시아와 동유럽 정치》 등을, 역사학 분야에서는 《영국 현대사》, 《국제사(International History)》, 《국제 경제사(International Economic History)》 등의 과목을 선택해 공부했다.


당시만 해도 캠퍼스에는 약 70여 개 국가들에서 온 외국학생들이 있어서 나는 네팔이나 모리셔스, 시에라리온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국가 출신의 제법 똑똑한 학생들을 만날 기회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국에서 선발된 국비유학생들로 자국의 어려운 경제 형편으로 풍족한 여건은 아니었지만 늘 열심히 공부했다. (1950~60년대에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갔던 우리나라 유학생들의 처지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연락이 끊어져서 그렇지 그들 대부분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그들 나라에서 제법 대단한 인물들이 되었을 거다. 아프리카에서 온 어떤 친구는 자기는 학위를 마치면 돌아가 머지않아 장관을 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웃고 말았지만 아마 그 말이 진실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그때 ‘정말 잘해줄걸’ 하며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다).





졸업반이던 해에 한 달이 넘게 진행된 졸업시험 통과를 위해 거의 1년간을 하루 2~3시간을 겨우 자며 견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험에 한 과목이라도 떨어지면 한 해를 더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튼 죽기를 각오하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 수면부족으로 심각한 눈병이 생겨 하마터면 공부보다는 기타를 배우는 게 더 나을 뻔했다. (길거리 버스킹을 위해서는 학부 탈락생보다 코드라도 익히는 게 도움이 되었을 테니). 





특히 1년간 죽어라 공부했던 《정치사상》 과목에서는 재시험까지 치르며 겨우 살아났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마르크스(K. Marx)나 레닌(V. Lenin), 그람시(A. Gramsci) 같은 좌파 색 짙은 인물의 저술을 읽는 것은 감옥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이름의 언급조차 금기시되던 터여서 고등학생 때부터 그들을 공부하던 영국이나 유럽에서 온 친구들과는 아예 수준 차이로 토론에 끼지도 못하던 형편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3시간 동안 치르는 논술 제목을 받아 들고 나는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영어도 부족했지만 무식한 게 죄였다).


영국은 학생도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만 교수들도 학생들 못지않게 연구에 최선을 다한다. 강의를 듣다 보면 교수님들이 객관성과 균형, 그리고 공정이라는 시각 속에서 세상의 다양한 문제들을 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학생들이 깨우치도록 배려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비교정치학》 수업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 이태리와 스페인의 정치체제와 운영을 놓고 수업이 진행되면서 역사적으로나 현실정치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마련이고 강의실에는 해당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 앉아있기 때문에 객관성이 배제된 부분에서는 다들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영국 정치학》 시간에도 영국과 영국이 지배했던 수많은 식민지 국가 출신의 학생들과의 의견 대립은 일상이어서 학생들은 늘 국가대표가 된 심정으로 수업에 임했다. (경험상 많이 아는 사람들이 말이 많기는 했다). 





《국제 경제사》 시간에 ‘전후 일본 경제의 부흥’이라는 주제의 강의에는 일본 유학생과 나 같은 한국 학생 사이에서 의견 충돌은 당연했다. (나는 안중근 의사의 심정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후손들을 당당하게 대했다). 그러나 교수의 강의는 공정하며 균형감을 유지했고 객관적 논리 전개를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는 생각에 늘 공감했다. 





국제 경제사를 강의했던 존 듀이(John Dewey) 교수는 콧수염을 기르고 제법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분이었는데 일본의 기업 이름이나 총리 등 사람의 이름을 일본 사람처럼 유창하게 발음을 해서 놀랐다. 휴식시간에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재벌’의 일본어 표기인 ‘Zaibatsu’를 100번 이상 발음 연습을 했었다고 웃으며 말해 주었다. 강의실에 일본 학생들이 있을 텐데 그들이 듣기에 이상하면 안 되지 않겠냐는 게 답이었다. (우리 기업 Hyundai를 ‘하연 다이’로 발음하는 게 살짝 못마땅하기는 했다).





지금 우리사회를 돌아보면 균형감과 객관성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정치인들은 다들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고 있고, 법을 공부해 현장에 있는 전문가들도 자기의 주장만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리곤 애먼 국민들에게 화두를 던져놓고는 알아서 판단하라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 대학 캠퍼스에서도 객관성과 균형 잡힌 지식보다 낡고 편향된 사조나 사상의 주입에 골몰하는 강의가 여전한 곳이 적지 않다. (교수들은 자신들이 오래전에 배웠던 지식을 여전히 존중한다).


사회 분위기가 이런 지경이니 갈등과 충돌이 시대 현상이 되었고 개인과 집단의 이익만 앞세우는 이기적 현상의 횡행으로 국가의 미래는 늘 바람 앞의 등불 격이다. 오래 전 같이 공부하던 학생들이 다들 귀국해서 자신들 모국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텐데 나는 시절을 회상하며 이 새벽에 ‘공정함’ 타령을 하고 있다. 가을이 깊어지기 시작하면 캠퍼스 인근에 빨갛고 노란 잎들이 풍성한 단풍나무들로 둘러싸인 버지니아 호수(Virginia water)에서 물안개가 잔잔하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황홀했었다. ‘잉글필드 그린(Englefield Green)’의 고요가 그리운 새벽이다.





(photos by H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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