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적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잘 보지도 않던 영화를 보기 위해 왓챠 플레이 정기 구독권을 드디어 끊고 말았다. 주변의 친한 친구들이 소위 일컬어지는 유명 영화들을 말할 때,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던 나는 그냥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는 게 다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영화보단 음악이 내게 훨씬 소중하다고, 그런 쓸데 없는 자존심을 부린 시절이 있었다. 왓챠 플레이 구독권을 구매한 나는 검색창에 sns에서 자주 보여 평소 호기심을 갖고 있던 <중경삼림>이란 영화를 곧바로 입력했다. 그러나 왓챠엔 중경삼림이 아직 없었다. 결국 네이버 series에서 대여를 하여 영화를 보았다. 그렇게 온통 낮과 밤이 영화로 뒤덮힌 내 새로운 낭만이 시작되었다.
왕가위의 <중경삼림>은 내게 단지 여행 같은 영화였다. 단발적인 세기말의 홍콩 여행.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주인공들의 연애와 이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적 혼란으로 채워진 '엉망인' 남녀관계는 내용적인 면에서 나를 약간은 실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California Dreamin'이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이 영화에 내 모든 오감을 뺏겨버렸다. 적색 이미지와 뒤엉킨 카메라 앵글은 캘리포니아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공허한 마음과 조금은 일치했고, 주인공 페이가 마치 한달이 넘게 끝나지 않는 장마 속에서 축축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California Dreamin’은 <중경삼림>의 예술적 땔감이 되었고, 영화는 이를 통해 표현하기 어려운 개인간의 정신적 혼란에 대하여 그 어떤 영화보다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었다.
California Dreamin’ 이후로 영화에 푹 빠져 지냈다. 평론가들과 친구들, 그리고 영화 미술을 하는 가족중의 한 여인을 보며, 예전엔 개인이 영화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난해한 미장센과 알 수 없는 심미적 내용을 이해해야만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였다. 나에게 '영화를 떼놓고 살아갈 수 없는' 이유는 영화 안에선 음악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저 평범하게만 들렸을 3분짜리 음악이 영화 속에서 흘러 나올 땐, '가보지 못한 어느 나라의 어느 가게에서 일하던 어느 한 인물이 듣는 특별한 어느 음악'으로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2018년 8월에 캐나다로 무작정 떠났던 나는 더 많은 영화를 봤다. 여타의 영화 주인공들처럼 나에게도 외국에 있던 5개월의 시간동안 또 하나의 내 인생작을 만난 순간이 존재했다.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이다. <킬 빌>은 B급 영화인 척 하는 A급 영화로 유명한 작품이다. 중간에 애니메이션 씬을 삽입하고, 뒤끝없는 잔인한 액션과 복수라는 매력적 소재를 활용한 활극이라는 점은 <킬 빌>이 왜 A급이란 평가를 받는지 설명해주는 주요 특징들이다. 이 때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3가지 요소들 뒤엔 언제나 영화사에서 전무후무한 정체성을 가진 'ost'라는 게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불후의 명반은 많은 이들이 들으면 바로 알만한 BGM들로 구성되어 있다.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는 '무릎팍도사'의 메인 BGM으로 사용되었고, <Woo Hoo>는 국내 광고에서 활용되었다. 타란티노는 복수극이란 어찌보면 뻔할 수 있는 소재를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주는 BGM들로 '타란티노식 복수'라는 하나의 범주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전환된 흑백 필름을 바탕으로 복수의 원흉이 <Bang Bang (My Baby Shot Me Down)>과 함께 흘러나오는 도입부는 스토리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완벽한 연출이었기에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한 강한 빌런으로 상징되는 오렌 이시 일행이 당당하게 걸어나오며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이 재생되는 중반부에선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등장씬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때 난 영화와 음악은 절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문화 예술 속에서 영화는 음악을 만들고 음악은 영화를 만드는 공생 관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킬 빌>을 본 후에 몇달 간 타란티노의 영화들을 모조리 다 보았고, 시간이 흘러 캐나다에서 한국에 돌아온 그 순간까지 타란티노의 작품 속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언제나 음악과 내용이 공존했다. <펄프 픽션>에서 미아와 빈센트가 척 베리의 <You Never Can Tell>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하나의 잡지 같이 흥미로운 여러개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 영화를 대유하는 최상의 상징이었다. 춤을 추는 연출은 영화에 흥겨움을 더하여, 보기만 해도 흘러넘치는 독보적인 매력을 형성해 기꺼이 잡지처럼 '소비되는' 영화를 만들어주었다.
영화를 많이 보면,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될 작품들이 생긴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살아가는 데 힘을 준다면,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나를 또다시 살게 해준다. 나에겐 3개의 '인생작'이 있다. 첫번째는 내 브런치 글에도 실린 <인터스텔라>, 두번째는 위에서 언급한 <킬 빌>, 그리고 세번째 영화는 이제 얘기해보려고 한다.
시중엔 참많은 '사랑 시'가 있다. 처음 본 순간 반한 그 때를 그린 영화, 썸을 타는 가사, 짝사랑에 힘겨워하는 노래, 실연에 의한 슬픔을 적어낸 문학 등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살고, 사랑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하기도 하는 그런 존재다. 여기 오직 사랑으로만 채워진 순도 100%의 멜로 영화가 있다. <우리도 사랑일까>는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을 등지고 또다시 다른 사랑에 영원함을 기대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적 변화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나약함을 표현했다. 우린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랑에 집착하고 구애하다, 시간이 흐르면 낡아진 사랑을 외면한 채 새롭고 자극적인 사랑에 눈을 돌려버린다. 영화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그러한 사랑의 순환을 노래하고 있다. 비디오는 낡아빠진 구식의 라디오를 소멸시킨다. 라디오는 언젠가 인류에게 보물같은 물건이었겠지만, 뉴 페이스인 비디오가 탄생함과 동시에 무시당한다. 영화는 어찌할 수 없는 어리석은 감정에 집중하고 있다. 아름다운 봄과 여름이 가면 추운 가을과 겨울이 돌아오듯이, 신나게 작동되던 놀이기구가 단 5분만에 확 멈춰버리듯이, 모든 행복은 끝나기 마련이며 또다른 자극에 의해 잊혀지기 마련이다.
또다시 '라디오'가 된 사랑을 뒤로 한 채, 주인공 마고가 <Video Killed the Radio Star>을 배경으로 놀이기구를 타는 엔딩은 영화의 주제를 정확히 함축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음악이 영화와 하나가 되는 지점을 체험했다. 음악과 영화는 공생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감성을 만들어내는 유기체였던 것이다.
해서, 난 음악을 너무나 사랑해서 오늘도 내일도 영화를 본다. 영화 속에서 음악을 듣고 음악 속에서 영화를 다시 곱씹어본다. 그 둘을 구분한다는 건 여전히 불필요한 사족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음악과 영화를 구분해서 생각하고 싶다. 그래야 같은 작품을 봐도 두번이나 다르게 느낄 수 있을테고, 이러한 반복은 언제나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바다를 그려낸 영화 속에서 바다를 그리워하는 음악을 듣는, 그런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