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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 에디터 Mar 15. 2020

자아의 성장 : 내 진정한 마음의 고향

영화 <브루클린>과 정지용 시인의 <고향>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 <향수>




누구나 한번 쯤은 읽어보았을 정지용 시인의 <향수>는 알고보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욱 씁쓸한 글이다. 겉보기엔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아름다운 고향을 묘사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흘러 바뀌어버린 고향의 모습에 실망하여 기억 속에서 환하게 존재하는 '과거 고향의 모습'이라도 잡고 있으려는 안타까운 화자의 심정이 투영되어 있다.


"너가 좋은게 아니라, 그때의 너가 좋은거야."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듯이, 정지용에게 다시 돌아간 고향은 그저 형식적인 실제 '고향'일 뿐, 다신 돌아갈 수 없는 비애의 공간이자 허무함을 상징하는 '아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고향'은 인간에게 어떠한 존재일까? 어떠한 존재길래, 이토록 정서에 깊게 관여하는 걸까? 사전상, 고향의 의미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그러나 사전의 끝에 잘 안보이는 곳에 한가지 뜻이 더 써 있다. 바로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마음'이다. 단 세 달을 살아도 내 마음 속 한구석에 어떠한 세계보다 강하게 위치한 그 곳. 고향은 그거면 충분하다. 정지용 시인이 기억하는 꿈에들 잊혀지지 않던 그 곳은 사실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곳은 분명히 시인의 마음 안에 살아 숨쉬던 행복의 여울이자 삶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브루클린>에는 정지용 시인과는 반대로, 고향이 아닌 곳에서 '마음의 서식지'로서의 고향을 발견하는 화자가 나온다. 그리고 향수의 화자가 느낀 '공허한 상실감'과는 다른, '뼈아픈 성장'을 경험한다. 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에서 살던 에일리스는 뉴욕으로 이민을 간다. 뉴욕의 브루클린에 정착한 에일리스는 하숙집에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민 초창기, 그녀는 고향에 대한 향수로 매일을 울며 지냈지만 점차 원하던 공부를 하고 토니라는 이탈리아 이민자 청년과 풋풋한 사랑에 빠지며 '진정한 나'를 발견해간다.


인생은 조금의 행복으로 버텨가며 살아가는 것이라 했다. 사실 그녀는 아일랜드에 살았더라도, 당연히 배움에 대한 기회를 접하고 좋아하는 남자와 연애 또한 했을 것이다. 그러나 브루클린은 아일랜드 속 작은 마을보단 모든 면에서 더 '빨랐다'. 브루클린에선 모든 이들이 공정하게 일을 하여 돈을 벌고 남을 신경쓰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에일리스는 평범한 소녀에서 마침내 브루클린에서의 자주적 생활을 통해, 주체적인 숙녀로 다시 태어났다. 그럼에도 걸어가야 하는 인생 속에서, 나로써 살아가는 법들을 체득한 숙녀는 앞으로의 긴 시간을 펼쳐낼 마음의 고향으로 브루클린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중간에 잠시 돌아간 아일랜드는 단잠같이 달콤했고 그리웠던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두 그대로 그 자리에 존재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비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온전한 '에일리스'로 살기 위해 그녀는 모든 걸 뿌리치고 다시 브루클린 땅을 밟는다. 이는 어릴 적 괴롭히던 미스 켈리에게 "내 이름은 에일리스 피오렐로에요"라고 소리치는 장면과 닮아있다. 결국 에일리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정한 마음의 고향은 출생지라기 보단, 그녀의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직접 개척해나가는 공간이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에일리스가 브루클린에 돌아가 토니와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어찌보면 편하지 않을 길을 선택한 에일리스에게 완전한 해피엔딩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향이 사라져 버린 자나, 새로운 고향을 찾아낸 자나, 고향이 없는 자나, 모두에게 고향이란 공간이 결말을 매듭 지어주진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어떠한 곳에서 어떤 나로 성장해 나갈 것이냐의 능동적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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