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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 에디터 Apr 17. 2020

나는 그때의 장국영과 다시 만난다.

장국영 주연 영화의 잇따른 재개봉

인간의 삶은 무상하여 봄날의 꿈과 같고..
-패왕별희


4월은 벚꽃이 만개하고 생명이 탄생하는, 개화의 달임과 동시에 여러 사람들을 떠나보낸 모순의 달이기도 하다. 4월의 어느 언저리 사이엔 영화 예술계를 빛내던 '장국영'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같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일 년에 한 번씩 피는 벚꽃이 한결같은 자세로 우리를 맞이하는 것처럼, 장국영이란 배우 또한 영화 속에서 여전히 그 모습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장국영 17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아비정전>과 <영웅본색 1과 2>, <천녀유혼> 그리고 5월 재개봉을 앞둔 <패왕별희>까지, 그를 빛내준 명작들이 다시 돌아온다. 아비정전과 영웅본색은 이미 영화관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1990년대의 홍콩과 참 잘 어울리던, 완전히 빚어지지 않았지만 그 서툴함마저 관객들을 매료시켰던 '발 없는 새' 장국영. 어찌 보면 관객들은 다신 찾을 수 없는 저 너머의 향수를 은닉하기 위해 그가 돌아오기만을 속절없이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영화 영웅본색, 네이버 영화
영화 아비정전, 네이버 영화

장국영은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대해 자유롭게 택할 수 있었다. 평소 그를 흠모하던 왕가위 감독은 장국영만이 완성할 수 있었던 1990년의 <아비정전>을 통해 그와 호흡을 맞췄다.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띈 앞의 두 작품과 달리, <아비정전>은 장국영의 내면 연기가 극대화된 작품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동성애를 둘러싸고 무성한 소문을 낳았다. 비록 그가 확실하게 커밍아웃을 한 적은 없지만, 어떤 성적 지향을 갖든 간에 그는 언제나 정해져 있지 않은 사랑의 형태에 대해 소신 발언을 하곤 했다. 하이힐을 신고 무대를 꾸미기도 하였고, 좋아하던 여성을 위해 홍콩에서 캐나다로 국적을 옮긴 사실 또한 유명하다. 세기말이 오기도 전, 많은 장벽과 시선들을 뚫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건 무엇보다 자신의 사랑이었다. 방황하던 아티스트였던 장국영. 죽을 때가 되어서야 편히 쉴 수 있다던 발 없는 새 '아비'는 그의 일면과 어딘가 닮아있어, 관객의 마음을 더욱 옥죄어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 패왕별희, 네이버 영화

질곡의 역사 속에서 진정으로 경극에 미쳤던 한 예술가, 패왕별희 속 '데이'를 연기한 장국영은 그의 연기 인생에 정점을 찍었다. 데이가 우희였듯이 장국영도 데이였다. 그는 육손의 비애를 안고 태어나, 문화 대혁명이란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상'이란 가면을 써야만 했다.


그는 경극에 미쳤습니다. 경극에 미쳐서...
관객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노래를 했습니다.
- 샤오러 우, 홍위병들에게


우희에 빠져 남은 일생을 다 바친 데이는 불타는 예술적 영혼을 단지 환영이 아닌 투영으로써 승화시켰다. 마치 이러한 데이의 모습을 상징하듯, 장국영은 데이와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본질적 외로움을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3시간이란 긴 러닝타임 내내 경극에 미쳐있던 데이는 결국 우희의 삶을 택하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된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해도 한결같이 우희로만 살았던 데이는 순탄해 보이지 않는 장국영만의 표현법 속에서 더욱 애처로이 살아 숨 쉴 수 있었다. 그의 전쟁 같은 연기와 중국 역사 속 문화 예술을 담아낸 풍부한 서사는 시너지를 발휘하여 패왕별희는 1993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왕별희라는 작품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단지 큰 상을 타서가 아닌, 어떤 이유로도 설명하지 못할 장국영의 슬픈 두 눈일 것이라고 감히 예측해본다.

영화 천녀유혼, 네이버 영화

이렇듯, 영화사에서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장국영이지만, 그의 작품보단 장국영이란 스타성이 더욱 주목받아 온 건 사실이다. 이러한 특성이 아쉬운 점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1990년대를 지나오며 그가 걸어온 작품들에 나와 함께 나이 든 명작을 감상하는 것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 중요한 관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혹자는 "만약 자신의 삶이 3시간밖에 남질 않았다면 장국영의 패왕별희를 보겠다."는 어떤 이의 말을 잊을 수 없다. 유수와 같은 세월이 지나, 오랜만에 우리 곁에 돌아온 그에게 관객이 갖출 예의는 그의 고독함에 대해 잣대를 들이댈 것이 아니라, 그가 지녔던 알 수 없는 외로움의 크기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 그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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