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윰 에디터 Dec 16. 2020

리비에라의 프리덤 #3

5시가 넘자 금방 해가 지기 시작했다. 어릴 적 엄마가 내 눈 앞에서 일부러 떨어뜨린 빨간 수채화 물통 색보다 더 진하다. 저 빨간 천에 내 얼굴을 깊게 짙뭉게 버리고 싶을 만큼 내가 싫다.


"단정하지 말라더니, 아까 한 말은 뭐였어?"

해영이 바다에 발을 반쯤 담구고 나를 노려보며 물어본다.


"눈치챘었구나 이미."

"세상엔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어. 난 그게 너였어. 그렇다고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건 아니야."

"나 좋아해달라는 거 아니야. 그냥... 일단은 여행때까지만은 이전 해영이 너처럼 굴어줘. 부탁이야."


말도 안되는 드라마의 엔딩씬 같았다. 그려낼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갑자기 들어와버린 것 같다. 벌써 5분이 지났는지 빨간색이 남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저기 죄송한데 사진 한 번만 찍어주시겠어요?"


한국인 남자가 나에게 카메라를 건내며 말을 건다. 그럼요- 이 쪽에 서보시겠어요? 머릿 속엔 몇 달 전부터 준비한 내 고백이 완전히 망했단 생각밖에 없다. 사진 속 남자는 웃고 있다. 활짝 웃는 입에 나도 저절로 따라 웃게 된다.


"두 분이서 여행 오셨나봐요. 자매세요?"

남자가 카메라를 다시 받으며 나와 해영에게 물었다.


"아뇨. 친구에요. 혼자 오셨나봐요?"

해영이 남자에게 물었다.


"네. 돌아가는 비행기를 잡지 않았어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있어보려고요."

"프랑스 좋아하시나봐요."

"프랑스 영화는 좋아해요."


둘의 대화에 낄 수 없었다. 이 익숙한 네거티브 스페이스. 그가 좋아한다던 프랑스 영화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듯했다. 석양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남자는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보이는 호텔에 머문다 말했고, 우린 홀린듯이 그의 방을 찾았다. 세번의 헛기침과 다섯개의 계단. 그의 방은 꽤 깨끗했다. 바다와 너무 가까워 밤엔 앞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폭죽이 있네."

해영이 그의 방을 둘러보다 쇼핑백에서 폭죽들을 꺼냈다.

"오늘 다 써버릴까?"


해영의 말에 남자는 정리하던 수건함을 내려놓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몽상가들 봤어? 거기 결말에 폭죽이 나오는데. NON, JE NE REGRETTE RIEN이 음악으로 나와."


"영화를 따라해보는 건 꽤 괜찮은 일이지."

별 일이다. 난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 앞으로 나가 남자의 등에 업혀 소리를 질렀다. 폭죽을 마구 내던졌다. 해영은 피고 있던 담뱃불을 함께 던졌다. 해영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남자처럼 누군가 사진을 찍어주는 것도 아닌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해영에게 석양 앞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뭐였을까? 너를 좋아한다고? 너와 이 곳에 와 석양을 봐서 참 좋다고?


3번의 폭죽이 터지는 동안, 나는 별안간 생각했다. 참 신기한 일이야.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저 커다란 불빛이 폭죽인지 석양인지 나는 도대체 알 길이 없다, 해영아. 석양도 분간하지 못하는 내가 너와 함께 가고 싶었던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작가의 이전글 리비에라의 프리덤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