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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 에디터 Dec 16. 2020

리비에라의 프리덤 #4

"아빠의 나라에선 내가 아프고 말았어. 또 다시 짐이 되고 말았지. 그런데 우리 아빠는 날 거기서도 버리지 않았어."

해영의 말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프랑스의 별은 하얗게 빛난다. 성운이 자라나는 대로 짝을 짓고 몸집을 키워나간다. 난 저 성운들도 우리같이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저 속엔 누군가 살고 있다고 믿는다. 혹시 모르지, 우리도 저기로 가게 될지.


남자는 자신이 성격이 급하다고 했다. 해영을 업고 이미 바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굽은 등은 그 사람의 영혼이 실려져 있어서 그런거래."

"내가 등이 많이 굽었어?"

"응. 업혀있으면 모든게 느껴져. 눈 몇 번 깜빡이는 지도 알걸?"

"그건 내가 이렇게 네 눈을 봐야지."


해영은 부끄러운 듯 눈을 피했다. 넌 너무 욕심이 많아- 바다로 쫓아가던 나는 해영이 의외의 모습을 가지고 있단 것을 알게 되었다. 둘의 영화를 여기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진 않네.


새벽 내내 우린 누워있었다. 어디가 젖은 지도 모른 채 너와 나는 이제 울상이다. 울상이 나쁜 건 아니다. 가끔 사람들은 표정으로 모든 걸 파악하려는 습성이 있다. 표정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아는 척, 위선이다. 내가 너에게 쉬운 언어로 어려운 동작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쉬운 언어만을 보고 상대방의 뜨거움보단 차가움을 느낀다. 듣기 싫은 평가를 입 밖에 내고 만다. 난 이내 질려버린다.  


일련의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하는 동안, 내 입은 그들이 조용해서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흰 과묵해서 좋아."


그 이후로도 우리의 침묵은 계속 되었다. 몇 분, 몇 시간일지 모를 침묵은 남자가 깨주었다.

"아침이 되면 어디로 떠날 거야?"

"해변 뒤 첫번째 골목에 개인 갤러리가 있던데. 거기에 가려고."

해영은 행여나 내가 먼저 대답을 할까봐 어디에 갈지 곧바로 말해주었다.


"너는?"

"나도 그 쪽은 안가봤는데.."

남자는 우리를 따라오고 싶어하는 것 같이 보였다.


해가 뜬다. 아침도 먹지 않은 채 갤러리에 갔다. 문을 두드려봐도 갤러리는 열려 있지 않았다. 해영은 갖고 있던 검은색 실로 문을 열려했고, 나와 남자의 기대와는 다르게 쉽게 문을 열고 말았다.


"갤러리 주인이 오기 전에 보고 나가면 돼."

"걸리면 열려 있었다고 하면 되지."

해영과 남자는 서로를 정말 사랑하나보다.


갤러리 가운데엔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잡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었지만 전혀 외설적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위로해주는 듯이 보였다. 사랑임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손이 얼굴이나 어깨에 있었다면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저 여자가 부러웠다. 누군가 내 가슴을 만져주길 바랬다. 저 여자는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포와 두려움, 속죄와 억압. 나를 괴롭히는 무언가. 책방에서 만났던 해영은 무언가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미치기 위해 시달리거나, 시달리기 위해 미치는 많은 사람들. 그 속에서 해영은 은은하게 유영하는 그런 무(無)존재 같았다.


"무슨 생각해?"

"해영아 미안. 나 잠시 너 생각을 했어. 책방에서 본 너에 대한 생각."

"난 어떤 사람인데?"


계속되는 우리 둘의 대화에도,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그림을 보고 있었다.


"해영아 이 그림 속 여자.. 나를 닮았어."

"아니야. 이 여자는 남자한테 기대어 있지만 넌 기대지 않잖아."

"기대고 싶으니 기대지 않는 거지."

"...석양 앞에서 할 말이  그거였어?"

"나 너에게 기대고 싶어."


그림 속 여자의 앞에서 나는 더욱 처연한 표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해영은 남자의 자리에 서있지 않다. 그녀는 나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 멀뚱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그제서야 남자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쳐다보았고, 궁금한 듯 눈빛을 보챘다.


"너 나 사랑하는 거 맞구나."

"기댄다고 사랑하는거야?"

"널 부정하지마. 기분 더 나빠."

"그럼 넌? 날 위하는 척하면서 너를 위한 사실만 강조할 뿐이지."


제일 먼저 이 곳에 들어왔던 해영은 가장 먼저 이 곳에서 나갔다. 남자가 급히 뒤를 따르려고 쫓아갔다. 그런 그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저 당신이랑 유치한 말 나눌 생각 없어요. 그저 당신의 마음이 궁금할 뿐이에요."

"전 해영이를 지금 쫓아갈 겁니다."


그 말에 더 잡을 수 없었다. 그와 해영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정처없이 걸었다. 내가 원하는 여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해가 더 빨리 졌다. 4시반에 하늘이 빨간색이 되어 있었다. 생각은 허상일지라도, 감정은 사실이다. 감정은 손에 쥐어 상대에게 보여줄 수 있다. 나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모른다. 사실을 숨기는 건 죄를 짓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길을 모르는 척 하면서 다시 갤러리로 향했다. 사장이 왔는지, 갤러리는 불이 켜져 있었다. 다시 들어간 갤러리는 아까 아침에 본 곳과는 많이 달랐다. 황금색 조명의 톤은 그림들의 사연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했다. 꿈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시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사장은 이해가 안갈 정도로 밝아보였다. 내가 당신이라면 갤러리가 문이 열려져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하루종일 울상이었을 텐데 말이야- 하긴 그 속은 울상일수도 있겠지. 나는 당신을 모른다.


익숙한 한국어 말소리가 들렸다. 언어도, 속내도 통역이 안되는 이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남녀가 가운데의 그림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여자는 해영의 옷을 입고 있다. 남자는 외투를 버렸는지 안에 보이던 베이지색의 티만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눈엔 내가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다시 뜨니, 그들은 그림 속 남녀와 어쩐지 닮았다. 남자는 해영의 숙인 머리를 받치고 서 있다. 어리숙한 분장 뒤엔 죽을 것 같이 괴로운 절망이 몸을 움츠리고 있다. 해영에게 남자는 신이 보내준 선물이다. 그들에게 사랑은 사실이다. 영화인줄만 알았던 저 둘이 회화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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