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이것을 위해 그동안 노력해 왔나?
현주는 부부 의사 밑에서 자란 "압구정 외동딸"이다.
부모님은 작게나마 개인 병원을 운영 중이며,
현주는 인서울 공대를 졸업해 잘 나가는 대기업에 최종 합격했다.
남들은 현주를 부러워한다.
밝고 모난 데 없어 보이는 해님 같은 성격,
그럴듯하게 면접을 통과할 외모,
그리고 비빌 언덕이 될 부모님도 있는데
본인도 대기업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기업에 입사한 현주는 혼란에 빠진다.
밖에서 봤을 때 현대적이고 미래 지향적으로 보였던 회사는
속으로부터 곪아있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고,
어쩌면 비정상인 건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회의감에 쌓이기 시작한다.
"신현주 프로"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조차 어색했던 수습 기간을 지나,
어느덧 어디까지가 적응해야 할 부분이며
어디부터가 용인되지 말아야 할 비정상 적 영역인지
혼돈에 빠져있을 때쯤 2년 차가 되었다.
현주는 4살 연상의 남자친구 주민우가 3년째 교재 중이다.
공과대학 공통 교양 수업에서 친해진 민우는
현주보다 반년 빠르게 입사한 회사 선배이기도 하다.
누나를 둘이나 둔 민우는 능글맞지는 않았어도
공대 남학생 중에는 여자를 대하는 게 익숙하여
나름 이점을 갖고 현주와 친해질 수 있었다.
현주는 매사에 성실하고 긍정적이며
크게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고
큰 욕심은 없어도 최선을 다하는
생활력 강한 민우가 마음에 들었다.
햇살같이 밝은 현주는 겨울이 다가올 때쯤 민우에게 물었다.
우리는 무슨 사이냐고, 계속 아는 사이로만 친하게 지낼 거냐고.
민우는 별 말 하지 못하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슬쩍 현주의 손을 잡았다.
그게 다였다.
둘의 데이트는 별 거 없었다.
민우의 대학원 입시 준비, 석사 졸업, 취업까지 3년은 금방 흘렀고
그 사이 현주는 옆에서 대학 졸업 논문을 쓰거나 취업 준비를 할 뿐,
둘은 함께면서 또 각자였다. 뜨겁지는 않지만 언제나 따뜻했다.
그 점이 아주 만족스러웠고, 그래서 둘은 잘 맞았다.
둘의 첫 위기는 민우가 취업했을 때 찾아왔다.
항상 평화롭고 기분의 고저가 없던 민우였지만
취업 후 태도가 바뀌었다는 게 현주의 생각이었다.
'내 얘기를 잘 들어주지도, 본인 얘기를 하지도 않아'
현주는 서운했다.
하지만 그 서운함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나도 정말 현주의 얘기를 듣고 싶어. 그런데 몸이 말을 안 들어.
사실은 입사 뒤로 줄곧 그랬어. 하지만 현주가 서운해할까 봐 말하지 못했어.'
현주가 불만을 토로하자 민우는 서럽듯 울며 실토했다.
민우는 현주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현주 본인도 취업 준비를 도와주는 민우를 보며
감사함이 서운함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민우의 덕으로 반년 뒤 현주가 입사를 하고서는
현주는 민우의 심정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며
둘의 사이는 돈독해지는 듯 보였다.
연애 3주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