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이름 2. 재희.
지수엄마의 입이 광대까지 걸려있다.
“연수엄마, 우리도 이거 열심히 들어서 책 내자. 요즘 에세이 내는 게 대세인 것 같아.”
“아니, 책이 무슨 어디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래. 그냥 들어보기나 해.”
“아유, 연수엄마는 너무 꿈이 없어. 이왕 듣는 김에 책도 만드는 거지.”
“응. 그런 지수엄마는 꿈이 많아 좋겠어.”
내가 문화센터 등록했다고 저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니, 신청하길 잘했다. 저렇게 좋을까.
가끔, 지수엄마가 부럽다. 지수엄마는 하고 싶은 것도 재미있는 것도 많다. 반면에 나는 늘 집에만 있고, 재미있는 것도 관심 가는 것도 그다지 없다. 솔직히 모든 게 조금 귀찮다.
반백년을 살면서 이미 해볼 건 해봤고, 몸도 슬슬 망가지고, 그다지 뭔가를 새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그냥 정해진 시간표대로 아침을 차리고 집을 정리하고, 장을 보고, 휴식하다, 저녁을 차리고 가족을 맞이하는 것이 나의 일과다. 그리고 나는 그 일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변화의 필요를 잘 못 느낀다. 가끔, 동네 엄마들이나, 동창들을 만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것이 나의 유일한 유희랄까? 사실, 그마저도 너무 장시간 출타하면 피곤하다.
그런데 지수엄마는 활력이 있다. 나이는 나랑 동갑인데, 요즘 유행하는 것도 많이 알고, 이곳저곳 여행도 다니고, 확실히 몸도 나보다 건강한 것 같다. 그런 에너지가 사실 조금 부러울 때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나에게 없는 부분이기에 그런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를 찾는 여정" 에세이 강습]이라 적힌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불투명한 유리문을 열었더니, 강사로 보이는 사람이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어서 오세요. 편하신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강의는 정각에 시작할게요.”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에, 노란 카디건, 청바지, 하얀 단화를 신은 강사는 서른여덟에서 마흔셋. 그즈음의 어딘가의 나이로 보였다. ‘나를 찾는 여정’이라기에 나이 지극하신 작가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은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구석자리에 앉으려는데, 지수엄마가 내 옷깃을 잡아 끈다.
“연수엄마, 여기 앉자.”
맙소사. 하필 강사님 바로 앞자리다. 질문이라도 하나 더 받을 것만 같은데, 행동력 좋은 지수엄마가 벌써 앉아버렸다. 조용히 곁에 다가가 앉았다. 집에서 챙겨 온 수첩과 필통을 꺼냈다.
필통에는 샤프와 지우개, 삼색펜이 들었다. 얼마 만에 챙기는 필기구인지, 가방을 챙기며 조금 설레었다. 아마 문화센터는 연수 초등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내가 문화센터를 오다니, 그것도 내가 강의를 들으려고. 새삼 놀랍다.
조금씩 사람들이 들어오고, 강의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수필가이자, 소설가 차혜원입니다. 반갑습니다. 우선, 주변을 한번 돌아봐 주시겠어요? 미소를 띠고 옆사람과 앞, 뒤 사람을 한번 염탐해 주세요.”
아, 이상한 요구가 시작되었다. 모르는 사람과 눈을 맞추라니…. 그래도 미소를 띠며 나도 염탐에 동참한다. 양 옆과 뒤를 돌아 눈인사를 나눈다.
“어떠세요?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대가 모여있죠? 방금 눈을 마주치신 분들이 이제 여러분의 동지가 되실 것입니다. 혹은 함께 글을 모아 출간할 공저의 동역자가 되실 수도 있어요. 그러니 얼굴을 잘 기억해 두시고, 마주치시면 미소를 날려주세요. 함께 글의 세계를 누빌 귀한 존재니까요.”
강사가 종이를 한 장씩 나눠줘서 보니, 빈 종이다. 강의 계획서인 줄 알았는데, 빈 종이라니. 그리고는 이어서 말한다.
“우선, 제 소개를 다시 하겠습니다.”
강사가 책상에서 그림 한 장을 들어 올린다. 그림은 르누아르를 연상시키는 햇빛 가득한 봄의 전경이 담겨 있다. ‘저 작가는 그림도 그리나?’라는 생각이 들 때, 강사가 이어서 말한다.
“네, 제가 그린 그림은 아니고요.”
몇몇 사람들의 작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저는 그림과 음악을 좋아하고, 그것을 감상하며 소소한 글을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블로거입니다. 특히, 풍경과 꽃을 좋아하고요, 음악은 주로 CCM을 좋아하지만, 다른 장르도 좋아합니다. 초등학교 학부모이고요, 꾸준히 스케치를 배우고 있는 학생이기도 합니다.”
강사가 그림을 내려놓고 잠시 수강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잇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나에게 한 질문인 줄 알았기에…. 긴장감이 극도로 몰려온다. 어차피 이제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겠지. 뭐라 소개해야 하지? 답답함에 숨이 차오른다.
강사가 말한다.
“방금 나눠드린 종이에 자신에 대해서 써보세요. 문장이 아니어도 좋아요. 그냥 생각나는 단어들을 적으셔도 돼요. 직업을 적으셔도, 가족관계를 적으셔도 됩니다.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 혹은 내가 주로 하는 것들. 또는 나는 이럴 때 행복하다. 이런 것들을 적어보시면 돼요.”
머리가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음표들로 가득 차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거? 내가 주로 하는 일? 행복할 때? 혼돈이 일어난다. 내 머릿속의 세포들이 서로에게 대답의 역할을 떠미는 것 같다.
“너무 장황하게 혹은 멋진 문장을 완성하려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글로 적고 싶으신 분들은 글로 나타내셔도 좋고요.”
강사가 한 발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돌아다니면서 보려고 하나? 다급하게 텅 비어있는 종이에 ‘주부, 엄마, 아내’라는 단어를 적어본다. 내 것을 보고 있는지 강사의 시선을 확인하고 싶지만, 눈이 마주칠까 긴장되어서 고개를 들 수 없다.
“참고로 오늘은 발표가 없습니다. 그저 오늘은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으려 해요.”
갑자기 마음이 고요해졌다. 물음표로 가득하던 머릿속이 발표가 없다는 한마디에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다.
“우리는 날마다 음식을 먹지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도 적어보세요. 또 내가 주로 머무는 공간, 내가 주로 개인적으로 돈을 가장 많이 지출하는 분야는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생각한 것들에 대한 이유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왜 이것을 좋아하는 가.”
마음이 한번 차분해지고 나더니, 이번에는 새하얗게 되어버렸다.
강사가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잔잔한 음악을 재생했다. 무슨 음악인지는 모르겠지만 피아노 선율이 아름다운 연주곡이다.
***
강사가 말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다시 그 꿈속에 있다.
끝없이 어둠 속을 부유하며, 내 눈은 그것을 찾고 있다.
손끝에 스치는 구겨진 채로 바싹 말라져 있는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쓴다.
이제는 그것을 잡아야만 한다.
그것을 잡아야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손은 허공만 허우적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