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이름 2. 재희.
즐겨보던 프로그램도 보지 않고 아침 내내 식탁에 앉아 있다. 지금 내 앞에는 종이와 필통, 그리고 샤프 한 자루가 나와 있다. 지난 수업에 받은 과제를 해야 한다. 이번에는 정말 발표할 것 같은데, ‘괜히 수업을 신청했나’라는 불평이 올라오지만, 끝까지 열심히 해봐야지.
주제는 ‘행복’. 지난 수업에 나에 대해 적은 것에 이어서 이번에는 장문의 글을 적어 보기로 했다. 최소 5 문장 이상 적어야 한다.
행복.
종이에 행복이라는 두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난번 강사님께서 강의 후 내주신 과제지를 꺼내 정독해 본다.
[행복에 관한 글을 최소 5 문장 이상 적어오기]
* 마음으로 들어가는 질문 *
‘행복’하면 떠오르는 순간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보기만 해도 ‘행복’ 해지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장소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행복’이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부러워하는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사람이 ‘행복’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행복’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한번 쓱 훑어보며, 하나하나 답을 생각해 본다. ‘행복’하면 떠오르는 순간. 음….
역시 윤서가 막 태어나 내 품에 안기던 순간이 나의 가장 ‘행복’의 순간인 것 같다. 간호사의 손을 통해 내 품으로 들어온 아기는 너무나도 작고 소중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하얀 천에 쌓인 아기가 내 품에 폭 들어오자 내 안에는 기쁨과 감격, 그리고 감사가 넘쳐났다. 모든 것을 이 아기를 위해서라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맞다. 꼭 그런 마음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울렁울렁 인다. 이것은 기쁨과 슬픔이 섞여있는 무어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다.
손을 뻗어 샤프를 집어 들고 종이에 적어본다. 샤프를 들어 글을 적는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샤프의 거칠게 미끄러지는 느낌이 묘하게 나를 상기시킨다. 곧 방금 떠올린 기억을 적기 시작한다. 적어도 세 문장은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행복했던 순간]
내 아이 윤서가 태어나던 날이 내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인 것 같다. 내 품에 아기를 받아 안을 때, 내 안에 기쁨과 감격, 그리고 감사가 넘쳐흘렀다. 그때는 이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라는 강한 마음도 들었다.
평생 열정이라는 단어와는 무관한 나에게 유일하게 열정을 품을 수 있는 대상이 태어난 것이다.
내 아기. 연수. 연수의 모든 처음을 함께하는 것이 내 삶의 행복이고 기쁨이었다.
나도 엄마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저 연수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 행복으로 느껴졌다. 맞다. 연수는 나의 전부이자 기쁨이었다.
그렇게 나의 열정을 가득 담아 자라나서인지, 연수는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열심히 한다. 그런 모습이 참 자랑스러웠는데, 이제는 그 모습이 부담된다. 그 아이의 눈에 내가 얼마나 초라해 보일지 생각하면 화가 나고 부끄럽다.
행복의 전부였던 아이가 이제는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변해 버렸다. 성인으로 자라난 아이는 더 이상 나의 손길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줄 수 있었던 모든 사랑이 더 이상 그만큼 필요하다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기분마저 든다.
이런 마음들이 쌓여 지금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 같다.
이제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누군가의 아내로, 혹은 엄마가 아닌, 그냥 나 자신 그대로 당당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나도 모르는 사이, 종이 한가득 나의 글로 채웠다.
샤프를 한편에 내려놓고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그랬구나.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았구나. 내가 쓸모가 없어졌다고 느끼고 있었구나.’
나도 몰랐던 마음이 글을 쓰면서 ‘툭’. 말 그대로 ‘툭!’ 튀어나온 것이다. 대체 이런 마음들이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생각해 보지만 알 수 없다.
어디 가장 먼 구석에 처 박힌 채로 그 위에 다른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꼭꼭 숨겨져 있었나 보다. 나름 부지런하게 하루하루 알차고 보람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종종 말하고 다녔다. 나도 바쁘다고, 내가 없으면 우리 가족들의 쾌적한 삶이 무너질 거라고. 물론 이 마음도 나의 마음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깊숙한 내면의 바닥 어딘가에는 이런 쓸쓸한 마음도 공존하고 있었나 보다.
“훗”
흐르던 눈물에 눈이 아직도 촉촉한데,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나를 찾는 여정]이라더니, 정말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찾은 것 같아 신기했다. 이러니 저러니 투덜거리며 지수엄마 때문에 등록했다고는 했지만, 등록하길 잘한 것 같다.
첫 강습에 나를 이만큼 발견하다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나와 마주하게 될지 기대마저 든다.
이전의 나라면 벌써 과제에서 도망갔겠지만, 세월이 나를 변하게 한 것인지 오히려 재미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재미있다. 잊고 살아온 재미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