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를 읽고
누군가의 삶이 언어로 규정되기 힘든 것처럼 명함이라는 네모 안에 가둘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이 제멋대로 재단하거나 정의 내리게 두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명함 없이 일했던 많은 사람들을 연민이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다면 '늠름함'이라는 단어로 재평가받을 수 있는 시발점을 열어준 책이었습니다. 하나의 현상을 기존과 다르게 서술했던 책이기 때문에 한국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하며 기사의 틀을 깬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 사회적인 이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되면 떠오릅니다. 그런 의문에 답을 통계자료를 활용함으로써 개인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느끼게 해 줬다는 점이 꽤 인상적이었어요.
어떤 한 사람을 네모난 명함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저는 명함뿐만 아니라 한 편의 글이나 책으로도 나타내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겁니다. 거대 서사로 이루어진 역사, 시대와 같이 큰 물결 속에서 한 개인은 보이지도 않고 구분하기도 힘든 물방울일 겁니다. 물방울의 이야기를 누가 궁금해할까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물방울의 인생을 살기 때문인지 아니면 역사 속 영웅의 삶을 동경해서일까. 저는 전자의 이유로 결과가 후자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명함을 만들 수도 있지만 작은 네모 안에 자신의 가능성이 갇힐까 봐 명함 따위 만들지 않는 사람, 경제적 대가보다는 자신의 일로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일하는 과정에서의 기쁨과 설렘을 더 소중히 기억하는 사람, 삶이 굽이칠 때마다 넘어지는 대신 툭툭 털고 일어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꿈꾸며 어제와는 다른 나를 만들어낸 사람,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안전과 권리도 생각하는 사람. p.222-223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저에게 책 속 이야기였어요. 비교할 순 없지만 엄마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었죠. 그 당시에 있었던 차별은 지금 명확하게 보이는데 그 이유가 차별의 역사를 우리가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래 문장이 유독 인상적이었어요. 아마도 가장 어려운 것이 지금 살고 있는 세상 속 차별을 찾는 일일 겁니다. 시간이 지나서 제삼자의 입장으로 상황을 바라보면 차별이 쉽게 보일 수 있겠죠. 그런데 자기 상황이 되면 차별을 보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예전 제 상황을 돌이켜보면 훨씬 이해가 쉬웠어요.
차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설명하지 어려워졌을 뿐이다. p.146
이 책의 제목인 '명함'에 대한 이야기를 번외로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저는 명함으로 하는 일을 정의하기 힘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네모 안에 가능성을 가둬둘까 봐라는 이야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아직도 삼성전자 퇴사 이유 중 하나로 이야기하는 것이 삼성전자는 저를 담기에 작았다는 이야기였거든요. 시간에 따라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일하고 싶어요.
최근에 '정희진의 공부' 팟빵 매거진을 구독하고 있으면서 소통이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위 주제도 사실 자신의 일이 아닌 이상 이해받을 수 있거나 소통할 수 없다고 생각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고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단서로 생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사람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부딪치며 내는 파열음이 옛날 부싯돌에서 불을 만들어낸 순간처럼 작동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고 모임을 하는 시간은 책을 몇 번 더 읽은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켜켜이 쌓아 올려 한 권의 책탑을 만들게 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