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여자>를 읽고
이 책을 다 읽고 덮고 나니 자연스럽게 문학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동안 나는 대체 문학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었을까 돌이켜보게 되네요. 최근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기회가 있어 10년 만에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10년 전에도 문학작품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고전 문학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읽는 사람이 동일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재미있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예전에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로맨스에 집중했었고 그 이야기가 가장 많이 기억났었거든요. 신기하게도 지금은 러시아 역사와 함께 읽히더라고요. 이번에는 레빈에 집중해서 읽게 됐고 레빈의 이야기가 그 당시 러시아의 이야기로 느껴졌어요. 아마 알게 된 사실도 다르고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두 번째 읽은 것이라 이미 알고 있는 내용보다는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 위주로 읽게 되는 경향도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피아노 치는 여자>도 예전에 읽었더라면 어떻게 읽혔을까 싶어요. 지금은 부모가 자식을 마치 소유물로 생각하게 되는 현상이 가져다주는 파국으로 읽혔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조금 과한 선정적인 표현이 그런 파국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였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거지. 그리고 굳이 그런 표현을 써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그 책은 차마 제 딸이 볼 수 있는 위치에 두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고 왜 책은 19금이 붙어있지 않는 것일까 하는 웃긴 생각도 해봤네요.
아니 에르노가 문학에 대해 정의한 부분을 참고해서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재현하는 문학에 가까운 것 같아요. 최근에 제가 좋아했던 문학은 찾아가는 문학이었거든요. 아무래도 무언가를 재현하는 문학은 문학과 비문학을 같이 읽으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책을 같이 소개해보고 싶어요. 참고로 예전에 무언가를 재현하는 문학을 꽤나 많이 봤기 때문에 이제는 찾아가는 문학을 더 선호하게 된 것 같네요.
> 제가 적은 글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찾아가는 문학에 가깝다고 처음부터 생각하셨던 분도 있더라고요. 역시 같은 책을 읽고 다르게 생각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모임의 재미죠.
사실 이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문학밖에 없다. 무언가를 재현하는 문학과 찾아가는 문학. p.137
<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전쟁 이후 어머니들의 삶을 다룬 기획보도가 바탕이 된 책을 읽게 됐어요.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을 읽었을 때 어머니와 딸의 유대관계의 특수성에 대해 이야기하게 돼서 조금 적어봅니다. 사실 이런 모녀관계는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번 책을 읽으면서 세계적으로 동일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아직도 비슷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문학작품은 무언가를 재현하면서 동시에 찾아가는 문학으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재현한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일 수 있죠. 어떤 사실에 기반해서 공간적 배경이나 시간적 배경을 설정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찾아가는 문학이라는 이야기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라는 겁니다. 문학작품이 찾아가는 문학이려면 행동이나 마음 또는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실사구시를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결국 문학은 도처에 널려 있고 그 작품들을 능동적으로 소비할 독자가 더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때로는 사람들에게 허구를 다루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 아니냐고 비문학보다 낮춰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문학과 비문학의 접근방식이 다를 뿐 세상을 재현하는 즉 반영하는 것은 똑같잖아요. 그래서 요즘엔 문학과 비문학을 같이 읽는 것이 꽤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 시대와 예전 이 책이 쓰인 시대도 다르고 나라도 다른데 '고전'이라고 이름 붙여 꾸준히 읽히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게 됩니다.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전'이다. p.19
<정희진처럼 읽기, 정희진> 중에서
'고전'이란 정희진 선생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처럼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매번 새롭게 읽히고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피아노 치는 여자>도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몇 년이 지나서 읽었을 때 저와 제 딸의 유대관계가 좀 더 긍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어떤 좋은 도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그리고 이런 책은 사실 모임을 해야 혼자 읽었을 때보다 (다른 분이 말씀하신 인상적인 문구가 있었는데) 독소를 뺄 수 있다고 했거든요. 선정적인 표현이나 자극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에로틱하기보다는 조금 폭력적이라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독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문학을 어렸을 때 읽는다면 소화시키지 못해 체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 우리에게 좋은 영향만 준다고 생각하진 않죠. 반대로 무엇을 잃는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어요. 이번에 제가 쓴 19금 영화와 비교 덕분에 '해맑음'을 잃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신선했어요. 그래서 전 이런 답을 했습니다. '해맑음'을 잃었다고 처음에 생각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말이죠. 그리고 그 '해맑음'을 지키기 위해서 문학을 통해 다른 영역을 의연하게 지켜낼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며 독자는 여기서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람은 패배로부터 배워야 하고 그것을 스스로 극복하고 배움의 자세를 갖춰야 나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혁명은 역사가 패배자의 기록일 때 가능'하다고 '정희진의 공부' 팟캐스트 매거진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이 책의 마지막에 스스로 어깨를 망가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깨는 피아니스트로써 피아노를 이제 더 이상 치지 못하게 하는 판단을 스스로 한 상징적인 행동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탈출을 하기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변화를 이야기하며 끝납니다.
에리카뿐만 아니라 엄마도 에리카 안에 갇힌 형태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리카의 상태에 따라 잠을 전혀 못 자기도 하고 집에 안 들어오면 걱정이나 불안 때문에 제대로 삶을 산다고 이야기하기 어렵잖아요. 어쩌면 각 개인이 스스로 옭아맸든 누군가에 의해 제압당하고 있는 본연의 욕망이나 욕구를 들여다보고 깨닫게 됐을 때 그 이후 실천이 스스로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살리는 판단이 될 수 있겠네요. 에리카와 같이 극단적인 상황이 펼쳐지진 않겠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에리카와 같은 상황에 쳐했던 적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문학뿐만 아니라 책을 읽으면 마지막에 하나의 질문을 저에게 던져주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립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