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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기

일곱 번째 편지

by 태양이야기

민혜님이 제 글을 읽으면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잖아요. 저는 생각이란 걸 하기 전에는 누군가의 생각이 제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느끼네요. 그리고 실제로 다른 사람의 생각대로 생각했기 때문에 행동도 그에 맞춰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해요. 아니면 나이가 미치는 영향도 있었겠죠. 어릴 때는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우선순위가 높았고 반대로 지금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라고 느껴져요. 요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드네요.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이상적인 교육은 잘 되어 있는데 막상 크고 나니 그렇게 사는 어른이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일 수도요.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로 할 수 있는 행동과의 괴리가 어릴 때보다 어른이 되면서 더 커지는 것 같아요. 갑자기 '나아간다'를 가지고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어서 먼저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네요ㅎ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그렇다면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 부분에 대해 민혜님의 이야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봐요. 바로 연결의 핵심이 '나'에 있다는 겁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나의 마음과 몸이 연결될 때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때 마음과 몸은 하나가 아니라 연결되기를 거부하고 연결되면서 느끼는 고통이 크기 때문에 더 큰 고통이나 자극이 없다면 서로 연결되지 않으려고 해요. 마음과 몸은 조금은 떨어져 있어야 자기 위안을 하면서 정신건강을 챙길 수 있기도 하니까요. 예를 들어 몸은 조금 삐그덕 거리고 건강하지 않은데 마음은 평온하고 마음이 편안한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을 수 있잖아요.


이런 와중에 코로나로 인해 자기 자신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죠.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의 시간으로 평가되거나 조금 과장해서 생각하면 현대의 전쟁터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처럼 한방을 크게 얻어맞고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는데 어쩌면 코로나는 현대판 전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네요. 전쟁이라고 하면 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거죠. 적을 이기려면 잘 알아야 하고 눈앞에 보이는 현상 외에 숨겨진 의도를 찾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리잖아요. 코로나가 꽤 길었던 만큼 그 시간을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민혜님은 잘 활용하신 것 같아요. 그 시간에 제가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안갯속을 헤매다가 안개가 걷히고 나니 발자국이 나란히 있는 것을 발견한 느낌이 들어요.


'나아가기'를 해야 하는 이유


코로나로 인해 단절과 고립이라는 현상은 일어났지만, 소외감이나 고통은 느끼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셨잖아요. 바로 소외감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쟁으로 인해 단절되거나 고립되는 현상은 똑같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선택할 수 있잖아요. 내가 선택하려면 선택지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만들어주고 키워주는 역할이 또 교육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 교육은 단지 제공만 해줄 뿐 온전히 자기 자신이 그것을 만들고 선택해줘야 합니다. 선택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교육이겠죠.

예를 들어 가장 최근에 읽고 이야기 나눈 <미친 노인의 일기>에서도 손주가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장면에서 할아버지가 자기 자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낀다고 생각했거든요. 누구든 소외감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앞으로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다는 예상을 합니다. 더욱 더 사람들은 소외되고 고통받을 수 있는 상황이 생길 것은 자명한 현실이니까요.


민혜님이 이야기한 것 중에 연결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라고 했던 부분을 생각해 봤어요. 태도는 교육을 통해 가르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다음에 민혜님이 연결은 강제할 수 없고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이것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이 할 수 없는 부분처럼 느껴져요. 마치 예술작품에 대한 설명이나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알려줄 수 있지만 예술가를 만들어낼 순 없는 것처럼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창작이 아닌 창조의 영역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창조는 어떤 작품의 형태에 국한되지 않고 연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정의, 상황에 대한 정의를 많이 하면 할수록 취할 수 있는 태도나 감정을 선택할 수 있을 확률이 높겠네요. 한마디로 창조할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떤 연결을 말이죠. 그런 태도는 무언가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자신이 규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벗어던질 수 있을 때 새로운 내가 되어야 어떤 상황에서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잖아요. 요즘 '시인과 혁명'이라는 화두에 빠져있는데 그것을 계속 생각하다보니 연결되어 생각할 수 밖에 없네요. 말하자면 시인은 언어를 의심하는 사람이라고 신형철 평론가는 이야기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시인과 혁명이 맞닿아 있을 수 있고 우리도 의심하거나 비판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국 교육으로 끝맺음을 하자면 기존의 사회규범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문을 가지고 질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해야한다고 봅니다. (요즘 교육 쪽에 있다보니 또 이야기가 교육과 연결이 자꾸 되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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