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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연결, 능동적인 태도를 통해

여섯 번째 답장

by 태양이야기

유정님의 글을 읽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어요. 그전에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다시 읽어보면 제 글은 주춤하고 머뭇거리는 느낌이 들어요. ‘이건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이런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이것에 대해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다시 유정님은 말해주죠. ‘일리가 있네요. 그래도 일단 한 번 뭔가를 시도해 봅시다.’ 그렇게 유정님이 꾸역꾸역 무거운 저를 데리고 씩씩하게 산길을 오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기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어요. 산 중턱에서 한참을 쉬었네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다시 올라갈 채비를 해 봅니다.


유정님 말씀처럼 근래 가장 굵직한 보편적 경험은 코로나 같아요. 코로나로 인해 큰 두려움부터 사소한 불편함까지 많은 변화가 갑자기 일어났던 기억이 나네요. 그 시절에 대한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거리가 좁혀지고 연대가 생겨나는 효과도 분명 있을 것 같아요(유정님께서 말씀하시는 연대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 간의 연결이라는 가정 하에 이야기해 볼게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욱 연결될 수 있을까? 저는 보편적 고통의 경험이 가장 강력하다고 말했었고 팬데믹이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물리적 고립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에요.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말해 볼게요.


팬데믹을 통해 많은 가치의 전복이 일어났던 것 같아요. 생존의 공포,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 물리적 고립으로 소외되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고통이 매일같이 뉴스에 도배됐죠. 사람과의 접촉에 대한 공포도 컸지만, 사람이 없어서 텅 빈 거리가 주는 충격 역시 컸던 시절. 그때 저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았어요. 그 시절 가장 활발히 참여한 사회생활은 독서모임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전환됐죠. 그 시절 누구나 겪은 아픔과 스트레스를 저도 겪었어요. 하지만 내심 그 시기를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떡 본 김에 굿 한다고, 미뤄온 자아성찰을 해 보기로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주일 넘게 집에만 있어 본 것 같네요. 거리두기 전에는 일을 안 해도 커피약속, 술약속, 취미생활로 일정표는 포화상태였고, ‘다음 직업을 신중히 선택하기 위해 나를 먼저 알아야겠다’는 휴식의 목적도 희미해지고 있었죠. 일과를 알차게 채우는데도, 우울하고 무기력한 한쪽 발을 질질 끌고 다니는 기분이었어요. 그러던 차에 거리두기가 악순환을 끊어준 거죠. 집에만 있으며 ‘보여지는 나’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들을 깨달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게 됐어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스스로 정신승리의 천재가 아닐까 싶을 만큼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환경에 적응을 잘한 적이 몇 번 있는데, 코로나도 그중 하나였어요. 그때 과연 내가 단절과 고립이라는 고통을 겪었나? 돌이켜보면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 같아요. 단절과 고립이라는 현상은 일어났지만, 소외감이나 고통은 느끼지 않았거든요.


제게는 어릴 때부터 고민하고 미루던 숙제를 “해치우는” 일이었고 거리두기 이전의 고통이 더 심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 생각해요. 이것이 팬데믹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고통이라고 생각해요. 죽음에 대한 공포, 거리두기로 인한 고립, 이 모든 것들로 인해 결국 그동안 회피하고 외면했던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강제로 주어진 거죠.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음을 앞둔 이반 일리치가 갑자기 인생의 현타를 맞이하는 비슷한 경험을 우리 모두가 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나는 누구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나 자신을 속이며 살고 있지는 않나?’ 스펙터클의 사회를 살며 회피해 온 이런 질문들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더 이상 예전처럼 친구를 만나거나 운동을 해서 찝찝한 기분을 지워버릴 수 없을 때, 스스로를 도무지 견딜 수 없고 시간의 무게와 죽음의 공포가 자신을 짓누르는 경험을 단 한 순간이라도 경험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한 걸음 본질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요.


과거에는 지금보다 보편적 경험이 더욱 풍부했던 것 같아요. 국민의 반 이상이 같은 시간 같은 드라마를 시청하던 시절도 있었잖아요.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같은 의식의 결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유머, 패션, 연애, 심지어 생각까지도요. 그러다가 모바일과 OTT가 보급되며 개인화가 가속화됐고, 보편적 경험은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아요. 특히 문화적으로요. 그래서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고통의 경험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역시 인간 조건에서 찾아야 하는 것 같아요. 출산, 질병, 노화, 죽음, 본능 같은 것들이요. 기술발전으로 편리함과 효율성의 시대를 살며 우리는 점점 인간 조건을 망각하며 살고 있어요. 이마저 비혼, 저출산으로 파이가 점점 작아지겠지만요. 오직 고통의 경험만이 우리를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준다면,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는 것 아닐까요. 이런 환경에서 팬데믹은 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가 인간의 본질, 인생의 진정한 본질에 가까이 다가간 첫 보편적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다시 연결로 돌아가서, 팬데믹 이전의 연결이 오직 유희와 이해관계에 의한 연결이었던 사람들도, 이런 고통의 경험 이후에는 더욱 진지한 태도로 연결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저 개인적으로도 팬데믹을 거치며 본질적이지 않은 연결은 재편되고, 가치에 의한 연결은 더욱 강화되었거든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팬데믹 기간 동안 한 번이라도 자기를 돌아본 집단경험을 통해, 연결의 가치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더욱 중요해지고, 확장되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기술에 의존하는 연결이 아닌 몸과 마음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시도해야겠죠.


연결의 핵심은 “나”인 것 같아요. “나” 없이는 타인도 집단도 없으니까요. 먼저 자기 자신의 태어난 그대로의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것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로 타인과 연결하는 것은 마치 책을 읽지 않고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이것이 원활하게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타인과 언제라도 연결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연결을 위해 우리는 먼저 고독해져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요.


또 한 가지는 연결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라는 것이에요. 기술이나 정책이 연결을 도울 수는 있지만 공감하는 태도가 결여된 연결은 기계적 소통에 불과하죠. 공감하는 태도는 오직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라는 감각은 자연과 연결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타인과 연결하기 이전에 자연에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연결은 강제될 수 없고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연결에 대한 진심이 없는 사람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또는 자기 안에 연결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스스로 창조할 의지가 없을 때, 연결을 가장한 기만과 착취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죠. 가장 건강한 연결은 내가 창조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해 나가는 연결이겠죠.


제가 생각하는 연결에 대해 이야기해 봤는데 유정님께서 질문하신 의도에 얼마나 부합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저의 왕국과 유정님의 왕국이 있다면 제 왕국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유정님네 왕국은 함께 으쌰으쌰 많은 것을 이룩하고 번성하는 거예요. 그럼 다른 왕국 사람들은 제 왕국보다는 유정님 왕국으로 가고 싶어 하겠죠? 그렇게 세력이 점점 커진 유정왕국을 보며 저는 점점 현타를 느끼고…… 주룩…. 하지만 유정왕국은 전쟁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나마 안심이 되네요…)


민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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