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을 읽고
멕시코가 배경인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서 막내딸은 결혼하지 못하게 하고 어머니를 모시게 한다. 중세 유럽에선 열한 번째 아이를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십일조로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바치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청년여성들의 자살률 증가문제의 원인을 파헤치고 있다. 문제가 새롭게 정의될 때 원인을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눠서 살펴본다. 개인적인 관점과 사회구조적인 관점이다. 여자들의 문제로 인식되는 많은 사안들은 대체적으로 사회구조적인 관점이 원인의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맨 처음 역사적으로 다양한 나라에서의 사례를 가져와 봤지만 우리나라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불과 500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은 단지 물건으로 취급받았다. 인권으로 인정받은 지 얼마 안 된 것이다. 그런 역사적인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다. 게다가 급격한 산업화 영향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사회구조적인 원인을 더 강화시키고 있다. 여성이라는 굴레에서 개인이라는 굴레로 바뀌었으면서 사회구조적인 원인을 음지로 보내서 사람들 눈에 안 띄게 만들고 개인적인 관점을 부각해 그것만 눈에 띄게 만들어버렸다.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체제가 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렌즈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가끔 섬뜩하다(p.118-119). 예전에는 추상적인 종교나 정치체제로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해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경제적인 맥락으로 설명해야만 이해가 가능한 경우가 더 많아진 것이 그러하다. 실제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세상을 이해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폄하하거나 인지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어쩌면 증발하고 싶은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인정해 주거나 인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수면 위로 상승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 또한 삼성전자를 퇴사해서 전직을 한 선택이 표준화된 경로로부터 과감한 이탈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다고 인식된다. 대부분의 이탈 '된다'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탈을 '선택'하더라도 수많은 이탈 '될' 위험에 처한다. 프리랜서의 삶을 선택한 뒤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면서 얼마나 여성들이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는지 체감한다. 이 책에서는 청년여성만을 대상으로 하기에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만 전 생애의 여성으로 범위를 넓힌다면 이탈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리해봐야 한다.
아무리 회사를 잘 다니고 아이를 잘 키워도 부모님의 돌봄이나 아이의 돌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탈 '될'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전에 사회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그 분위기가 어떻게 만들어질지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본다면 굉장히 큰 문제가 발생해야 했다.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어느 정도 기반이 만들어져 있다면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도 좋을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준화된 경로에서, 이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 '된다'. 표준화된 생애경로는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명문대를 자퇴하는 학생들이 유명해지는 까닭은 그들의 선택이 표준화된 경로로부터 과감한 이탈이기 때문이다. 명문대라는 이력에 따라올 혜택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p.10
신자유주의와 자기 통치
앞서 참여자들이 경험한 반복적 이직은 열악한 노동지위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러한 '선택'은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행위로 이동을 의미화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압박에서 비롯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체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즉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이고 그러한 삶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인을 인식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틀로도 작동한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특정한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위치 지으면서 그러한 삶을 향해 정진하도록 우리를 통치한다. 모든 사회관계의 토대를 시장으로 간주하여 시장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도록 명령하면서 국가를 넘어서 전 세계적 차원에서 합리성을 구축하고, 동시에 경제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의 전 영역에서의 합리성의 세계를 그려낸다. / 신자유주의 사회의 통치성 아래에서 '안정성'은 '변화와 상징'으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 다시 말해 안정성의 의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뜻하게 되며, 그런 측면에서 '안정성'은 특정한 삶이 아닌 우리가 획득해야 할 '상징'으로 활용된다. 평생 동일한 직장에서 숙련을 쌓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던 과거의 합리성은 점차 사라지고, 급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면서 커리어를 쌓아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이 새로운 합리성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성하에서 통치는 자기 통치를 통해서, 즉 통치의 기술과 절차가 체화되어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치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경쟁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자기 통치는 스스로를 하나의 기업으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라는 기업에서 우리가 지닌 자본은 기술과 능력, 즉 인적자본이다. pp.118-119
모임을 하면서 생각하게 된 내용을 적어보았다.
자살이라는 단어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은 보험이다. 즉 사회보험이라는 것인데 4대 보험.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다니면서 4대 보험이 되는 것이 기본 전제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는 삶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 나 또한 예전에 직장을 다닐 때는 알지 못했던 사실을 프리랜서로 살아가면서 직접 체험하다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다. 전체 인구의 절반은 4대 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