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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기 위해 방황하는 인간

<파우스트> 비극 제 1부까지 읽고

by 태양이야기

인간이라면 파우스트의 달콤한 제안을 마다할 수 있을까 싶다. 그것도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고 있는 경우면 더욱더 벗어날 수 없는 유혹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상황에 만난 연인이 결혼하게 되는 경우를 두고 인생은 타이밍이라고들 말한다. 이처럼 유독 인간이 취약할 때 악마가 나타난다. 그 악마가 <파우스트>에서는 실제 메피스토펠레스일 뿐 인간세상에서 악마보다 더한 인간들이 활개 친다. 그렇다면 그런 경우에 어떻게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지 현실적인 방황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라면 살면서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보다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가장 유명한 문구가 바로 그것이지 않은가. 하느님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인간을 믿는다는 의미로 이야기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니라.


파우스트는 방황에 걸맞게 메피스토펠레스가 하는 행동에 의견을 보탠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지만 넘어간 이후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졌나 보다. 특히 메르헨을 유혹하고 싶어 했지만 이후 벌어진 참사에 견디지 못하는 모습에 책임감이 느껴졌다. 물론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말이다.


그 외에 세상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여러 인물을 등장시켜 표현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바그너는 엘리트주의를 신봉하는 모습이었다. 일상적인 모습을 보면서 혐오스럽다고 표현(p.49)한다. 초반 무대 서막 부분에서 단장의 말도 동일한 표현이 있는 것 같다. 단장은 '쉽게 생각한 것이 내놓기도 쉬운 법일세. 자네가 완전한 작품을 내놓는다 해도 무슨 소용 있겠는가. 관객들이 어차피 조각조각 뜯어낼 텐데.'라고 시인의 작품을 일반 관객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p.11) 시인은 관객을 믿으려 하지만 단장은 그렇지 못하다.


시인은 자신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리고 단장은 그것을 직접 보여주길 청한다. 왜냐하면 단장 또한 처음엔 '나는 대중들을 즐겁게 해 주길 무척 소원하였네. 무엇보다도 그들 스스로 살아가면서 남들도 살게 해 주기 때문일세.'(p.9)하고 말하며 대중을 위한 그렇게 파우스트가 시작하다 보니 시인의 자아실현 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메피스토펠레스조차 파우스트에게 시인을 사귀라는 조언(p.82)을 하는 걸 보니 말이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티격태격을 읽다 보면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젊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요술의 힘을 빌리지 않는 방법은 곧장 들판으로 나가서 호미질하고 곡괭이질 하는 것이오.' (pp.106-107)에서 내가 생각하던걸 공감받은 느낌이랄까. 이후 교회는 튼튼한 위장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나라를 집어삼키고도 아직껏 탈 한 번 나지 않았소.(p.128)라고 말하는 부분 또한 만약 당시였다면 내가 했을 대사였다. 현실에서 고고한 척, 선한 척, 정의로운 척에 대한 조롱을 담아내고 있었는데 왠지 1,2독 할 땐 보이지 않았던 게 세세하게 잘 느껴졌다. 아무래도 대작은 세 번 정도 읽어야 그 내용을 음미할 수 있는 건지 의문이 생긴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너와 동등한 존재(p.31)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상당하다는 걸 보여준다. 메피스토펠레가 자신을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만들어 내는 힘의 일부(p.65)라고 소개했듯이 파우스트가 자신의 믿음을 느낄 수 있는 실천의 장이 마련되어 있다면 악마와 계약을 했을까 의문이 생겼다. 초반에 신은 파우스트를 건드려봤자 넌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게 어떤 상황에 놓이지 못해 신을 버린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 같았다. 파우스트가 중간에 자연은 내 앞에서 문을 닫고 사유의 끈은 끊어졌고, 지식이라면 신물 난 지 오래(p.81)라는 게 마치 지금의 한국을 비춰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현실 정치에 눈을 돌리고 있었던 나를 대입시킬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파우스트가 메르헨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이후 달라지는 것처럼 어쩌면 나도 이런 상황에서 굉장히 달라지는 게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이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걸 보고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다. 자신의 의지로 감옥에서 나오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위해서였겠지만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 즉 파우스트를 변화시켰다. 자신의 의지를 지키는 단 한 사람이 주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로 인해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괴테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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