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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Sep 05. 2022

수치심에 잡아먹힌 한나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먼저 읽어보시고 후기를 읽는 것을 더 추천드립니다)


 [책 읽어주는 남자]를 들어봤거나 영화 '더 리더'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영화를 보지도 않아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책을 읽었다. 책은 총 1,2,3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미하엘(15세)과 한나(36세)가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2부에서는 한나가 재판을 받는 과정이 나온다. 이때 미하엘은 22세, 한나는 43세이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한나가 감옥에 갇혀 생활하는 동안의 미하엘의 인생과 마지막에 둘의 재회로 이루어져 있다. 미하엘이 30세부터 40세까지의 10년 동안 일어난 일이다.


우선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트레바리'라는 독서모임을 하는 플랫폼에 유지원 작가님과 함께 하는 '이참에 읽자' 클럽에 선정된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야기 나눴던 내용들이 너무 인상적이고 남기고 싶다는 마음에 처음으로 독후감 이후에 또 글을 쓰게 됐다. 독일 문학을 다루는 클럽인 만큼 이번 책은 나치 시절을 독일이 어떤 마음으로 견디고 살아나갔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때 독일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가 책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독일 국민들은 오랫동안 나치의 잘못을 반성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목이 왜 [책 읽어주는 남자] 였을까?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주는 행위는 평소에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서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 말고 거의 없을 거다. 그렇다면 책을 읽어준다는 것이 상징하는 무언가를 염두에 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나는 문맹으로 책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수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나중에 한나가 나치 수용소에서 일하는 것과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수동적으로 어떤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치 수용소에 일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 말이다. 

 그 당시 나치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은 라디오를 통한 사상이나 이념 세뇌가 있었다고 한다. 라디오가 가정마다 보급되지 않았다가 나치가 대량으로 생산해 싼 가격으로 라디오를 제공했었다. 그때 나치에게 라디오 전략으로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던 당시 사람들을 나타내기 위한 제목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어주는 행위가 어떤 전희 행위를 상징한다. 그래서 미하엘은 호르몬이 몸을 지배하던 시절에 단지 유희를 위한 행위라는 생각으로 책 읽어주는 것에 처음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는 자신도 유희에 동참하기 위한 것인지 책 읽어주는 것에 좀 더 열의를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1부 채찍질하는 한나와 사람들에게 한나를 소개해주지 않은 미하엘


 한나와 미하엘의 만남으로 시작해서 사랑이 무르익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것이 여행에서 한나가 미하엘에게 채찍을 휘두른 장면이었다. 

 문맹이라고 하면 감정표현에 좀 더 서툴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게다가 미하엘이 남겨둔 쪽지를 읽지 못한다는 수치심까지 더해져 감정이 폭발해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끔 우리는 상대방의 밑바닥을 봐야 신뢰가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말할 때가 있었던 것 같다. 미하엘은 이때부터 한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한나에게 있었던 주도적인 관계 맺기에서 미하엘도 같이 참여하는 관계로 변한다.

 그럼에도 미하엘은 한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길 꺼려하며 결국 한나가 떠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며 평생 후회하게 된다. 아니 평생 그 사실을 마음에 안고 살아가게 된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 현대 소설 중에 '노멀 피플'이 생각난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인을 알리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데 현대적으로 해석된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흥미진진하다. 물론 로맨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주제가 얽혀있다.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추천해본다.


 1부에서 미하엘이 한나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왜냐하면 한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기보다 외면적으로 비치는 모습만 탐닉했을 뿐이다. 물론 한나가 안 보여주려 한 것도 있다. 자신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드러나려 했을 때 과격하게 공격함으로 방어하려는 행동이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미하엘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한나와 만나면서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나도 안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떠나기 전에 한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수영장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을까.


2부 나치 수용소에서 일했던 한나, 내가 한나라면 문을 열 수 있었을까?


 지멘스에서 일하다 문맹인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나치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기까지의 한나 이야기가 책 속에 나와있지 않다. 추측을 해봐야겠지만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쩔 수 없이 나치 수용소에서 일하게 된 한나의 모습을 그려봤다. 사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전쟁 이후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환경이 좋지 않은 공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채 일한 세월이 꽤나 길었다. 물론 지금도 보이지 않은 곳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있다.

 수치심으로 가득했던 한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수치심은 나 자신을 1인칭과 3인칭으로 분리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사르트르가 쓴 대로 "타자가 나를 보는 대로" 나를 인식하는 능력이다.

<마이너 필링스> 중에서

 그리고 한나는 자신을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였을지 가장 궁금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수치심이 한나를 얼마나 갉아먹었을까? 수치심은 자신을 1인칭과 3인칭으로 분리한다고 한다. "타자가 나를 보는 대로" 나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나를 맡겨두는 것이다. 실제로 재판에서는 타자에게 자신을 내맡기면서 사건을 외면한다고 느껴졌다. 결국 수치심이 가장 큰 감정이었기 때문일까? 얼마나 수치심이 커야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럼 나는 어떤 수치심을 가지고 있는가 자문해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수치심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사실 지금까지도 피해의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수치심으로부터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른 책을 읽으면서 느끼고 있다.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소수적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것을 또 온전히 개인이 감당하고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 폭력적이다. 다수의 시선으로 소수를 바라본다면 한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 다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필요할 때마다 소수적 감정을 꺼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간다.

소수적 감정은 현대 미국 문학에 잘 등장하지 않는데, 그런 감정이 생존과 자기 결정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서사에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소설의 구성 원리와는 다르게, 소수적 감정은 중대한 변화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의 결여에 의해, 특히 변하지 않는 구조적 인종주의와 경제 상황에 의해 촉발된다. 소수적 감정을 다루는 문학은 인종 트라우마를 개인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극적인 장치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트라우마가 개인을 제자리에 묶어 두는 현상을 탐구한다. 제자리에 묶인다는 것은 "흑인이면서" 테니스를 치고 "흑인이면서" 외식을 하는 것이다. 

<마이너 필링스> 중에서


 그럼 과연 내가 한나라면 문을 열어줄 수 있었을까? 답을 자신 있게 한다면 너무나 오만하다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면 답을 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렇지는 않다. 최근에 본 전시가 떠오른다. 전시 이야기를 하면서 답을 풀어나가고 싶다.

 '히토 슈타이얼 : 데이터의 바다'라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는 전시였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지금은 데이터를 통해 전쟁 중이고 우리 개인 또한 전쟁에 참여 중인데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이나 SNS 활동이 미치는 영향이 있고 그로 인해 피해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나도 자신이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극단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도 못 읽는다는 수치심이 가득한 내가 뭐라고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당시의 화재를 보면서 '설마 사람들이 죽겠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수치심에 잡아먹힌 한나는 현실에 대한 냉소를 간직하며 내가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생각조차 잡아먹혀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같은 상황이라면 희망을 가지고 나 자신이 무언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재판 과정에서 한나 외 다른 피고인들의 행동이 전시에 등장했던 브랜드들이 떠오른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누군가에게 덮어 씌우면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행동 말이다. 나치가 권력을 잡게 만드는 계기, 나치 이후에 자본주의로 넘어가며 잘살게 된 나라들은 피해를 입은 많은 나라에게 빚지고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3부 변화한 한나


 결국 한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상황을 끝냈던 이유는 미하엘이 어렸을 때 한나를 외면했던 것이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한나가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한나가 배우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를 것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편지를 쓰지 않았던 것이 그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한나를 자신이 처음 만난 그 시절의 한나로 고정시켜놓고 자신도 그 상황에서 전혀 자라지 못했다고 느껴진다. 결국 결자해지가 안된 이후 관계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독일 스스로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스스로 잘못을 깨달았다면 개선하고 행동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미하엘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 실수가 지금까지 발목을 잡고 성장하지 못했다면 다시 돌아봐야 할 것이다. 내가 아직도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말이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신만의 착각일 수 있다.


왜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했을까? 나는 잘못된 판결이 내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나의 평생 거짓말과는 상관없이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나를 위한 정의이면서 또 한나의 뜻에 반대되는 정의였다. 그러나 나는 사실은 정의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한나를 과거의 모습대로 혹은 그녀가 원하는 모습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간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안 된다면 간접적으로라도 그녀에게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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