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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Nov 30. 2022

본성 그대로의 삶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그리스인 조르바>의 초반을 읽을 때 조금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서 과연 이 소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의아했었습니다. 중반 이후를 거쳐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 갑자기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 그 5,000년의 역사>가 떠올랐어요. 경제학자들이 정설처럼 교육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화폐가 물물교환의 수단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화폐가 생긴 이후에 신용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전부터 신용이 화폐를 대신했던 사례가 굉장히 많았는데 일례로 인간의 본성 중의 하나이지만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꺼려하는 성에 대한 부분이었어요. 서로 다른 부족끼리 신뢰를 쌓기 위해 춤과 노래, 그리고 성을 나누면서 화폐가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거든요.

 마찬가지로 조르바도 마치 예전 화폐가 없었던 시대를 상징하면서 본성 그대로의 삶에 충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 종교와 개인


 조르바는 국가, 종교라는 권력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고 있습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반대의 생각을 한다는 면에서 아나키스트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까 언급했던 책의 저자가 생각났나 봅니다. 그 저자도 아나키스트였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은 인간을 믿지 않는 겁니까?" "화내지 말아요, 보스. 난 아무것도 믿질 않아요. 만일 내가 인간을 믿는다면 신도 믿을 거고 악마도 믿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뒤죽박죽, 혼란이 시작되지요. 그리고 그게 문제를 일으킵니다."

 사실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부분을 보면 니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조르바 자신도 이중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부분이 꽤 많이 등장합니다. 과부를 천사처럼 표현하는가 하면 어떨 때는 창녀처럼 묘사하기도 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식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국가, 종교가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의 책임을 온전히 지지 않는 것처럼 조르바도 책임지지 않는 인간상을 그려내면서 둘 모두를 비판하고 있는 소설이 아닌가 생각해봐요.


과연 문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무엇을 무너트려야 할 것인가는 알았지만, 폐허 위에 무엇을 건설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필요하고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도 스스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자기애 때문이지 실제로 문제가 없을 순 없잖아요.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는 것은 개선하려는 욕구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밝히는 것은 그 국가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수 있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이 떠오릅니다.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하려는 의지로 가득 찬 국민들이 있었기에 성공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았거든요. 최근에 독일과 우리나라를 비교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면서 문제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마치 독일은 나라 전체가 좀 더 성장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지배층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결국 무엇을 무너트려야 할 것인가는 독일과 우리나라 모두 알았지만 그 폐허 위에 무엇을 건설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논의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차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 편으로는 조르바가 약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헨리경처럼 누군가 본능에 충실하도록 유혹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모두 본능은 있는데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결국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말썽이 생기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르바가 물어보는 것이 굉장히 의미 있었어요.

나는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난 말썽이 생기는 건 원치 않아요." 내가 짜증을 낸 건 나 역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꼭 날짐승처럼 내 앞을 지나가던 그 치명적 몸뚱이를 욕망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르바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말썽이 생기는 건 싫다고요? 그럼 도대체 보스가 원하는 건 뭡니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본능이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본성 그대로의 삶을 살면 해결되는 것인가 질문해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성 그대로의 삶을 살면 해결되는 것인가


 본성 그대로의 삶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음악과 생물학적인 본능에 따라 남녀를 탐하는 행위가 떠오릅니다. 가끔 라이브로 어떤 곡이 연주될 때 왜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나기도 하는데 이것이 본성인가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때로 그가 격정적 멜로디의 곡을 연주하면 삶이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의미하고 보잘것없어 보여 숨이 턱 막힌다네. 또 때로 그가 구슬픈 곡을 연주하면 삶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영원히 구원은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네.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필연을 받아들이는 것, 필연적인 것을 자유의지로 전환시키는 것,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인간이 해방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침묵을 지켰다.


 그렇지만 본성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겠죠. 그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 순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런 삶이 누군가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알 수 없죠. 사실 조르바의 광기가 요즘 제가 많이 들었던 광기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고 나니 본성 그대로가 다르게 읽히더라고요. 본성 그대로가 어떤 장치도 없이 자연 상태 그대로 있지 않고 조금만 다듬어졌다면 어떤 부분에서는 좋은 문제 해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제 중심적인 관점으로 말이죠.

 그런 면에서 다른 분들의 의견이 궁금하긴 하네요. 조르바의 광기를 어떻게 보셨을지 말이죠.


조르바는 단호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조국에서 해방되었어요." 그리고 잠시 후에 이렇게 덧붙였다. "조국에서 해방되고, 신부들에게서 해방되고, 돈에서 해방되었지요. 말하자면 나는 걸러진 거예요. 나는 가벼워졌어요. 말하자면 나 자신을 해방해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된 겁니다."
그 줄을 자르려면 광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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