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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고통

세 번째 답장

by 태양이야기

유정님에게


저는 고통이 절대적이기보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때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죠. 다만 환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사회, 시대, 전쟁, 이념, 본성, 유전자, 따지고 보면 신과 온 우주에 책임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저주토끼>에서 읽었듯, 아무리 처절하게 노력해도 분노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은 불가능하죠. 저는 인간이 겪는 고통이나 조개가 겪는 고통이나 그 본질은 같다고 생각해요. 모든 존재는 자기 몫의 고통밖에는 알지 못하기에. 고통이란 결국 외부로부터의 자극, 또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내부적 요인에 의해 유발된 현상과 감정이잖아요.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무수한 변수가 존재하죠. 만약 역사상의 모든 예술작품을 통틀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비극을 투표한다면 문화마다 시대마다 결과가 다 다를 거예요.


인간의 고통과 동물의 고통에 다른 점이 있다면 다만, 인간은 상상력을 가졌기에 그 감정을 분노, 집착, 불안, 공포, 복수심으로 조금 더 확장시킨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상상력이 있기에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 역시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저는 믿어요. 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자극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 자극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요. 필경사 바틀비처럼,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은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보고 스스로 거절할 수 있다고요.


그렇다고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유정님과 대화하고 나면 세상과 연결된 느낌을 받아요. 잔뜩 웅크린 마음을 밖으로 향하게 해 줘요. 사실 스스로에 대해 아주 깊이 성찰한다고 해서 평범한 사람이 얼마나 큰 깨달음과 정신적 힘을 얻을 수 있겠어요? 은둔, 폐쇄, 고립은 답이 아니더라고요. 세상과 열렬히 관계 맺으며 나를 발견하고 조형해가는 지난한 과정 속에 삶의 해답을 향한 더 큰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신중하고 쿨한 사람이 멋져 보였는데, 요즘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버럭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멋져 보이네요. 그동안 행동하지 않고 흘려보내기만 하던 생각들을 이렇게 꺼내놓는 시도가 저에게는 세상을 향한 육중한 문 하나를 연 느낌이 들어요.


다만 인류가 피할 수 없는 보편적 문제는 사회정의보다 인간의 내면이 아닐까 생각하는 거예요. 나름의 굴곡 있는 인생사를 겪었지만, 그 모든 사건을 초월해 인생의 밑바닥을 관통하는 저의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이거든요. 칭찬받고 사랑받아도, 아무리 많은 연대와 지지가 있어도 인간에게는 도무지 위로받을 수 없고 채워질 수 없는 외로움이 존재해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고통받은 사람들이 연대를 통해 정의와 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근원의 고독이라는 또 다른 고통에 직면하게 될 거예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숙제니까요. 모든 사람이 돌고 돌아 결국 같은 고통 앞에 서게 되는 것이라면, 그 보편적 존재의 공포부터 되짚어 나가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네요.


다시 강조하자면, 저는 정의롭게 구현된 태유정월드에서 철학자로 살고 싶어요. 아직은 태유정월드가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저처럼 책을 읽고 정신의 사치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음을 잊지 않고 있어요. 내가 원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나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싶을까? 나는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숙제가 아주 많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게을러서 미루고 있는 학생의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민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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