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편지
고통은 시대와 환경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예전처럼 신분제가 그대로 있었다면 아마 지금 느끼는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우리가 고통을 느끼게 되는 이유를 상세하게 스스로 분석해보는 시간도 필요하고 그에 대한 반응도 기록해두면 굉장한 쓸모가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겁진 않더라도 개인에게 생산적일 수 있는 자극제였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민혜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지고 있네요. 지금까지의 내용을 잠깐 정리해보면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고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고통을 주체적으로 겪어냈려면 스스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가능할까 의문이 드네요.
우리는 지금 시대에 태어나면서 과거 신분제 사회에 살지 않는 대신 스스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증명해야 할 역할을 자연스럽게 떠안게 됐죠. 최근에 읽은 <철학책 독서 모임> 중에 개인의 정체성을 세 가지로 분류했던 내용을 가져와서 고통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해요.
정체성의 편집자들
'너는 누구냐'를 세 가지로 묻기 우리들 각자는 서로 다른 정체성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세대에 따라, 성별에 따라, 태도에 따라 정체성 물음은 각기 차별화된다. 카림은 민족적 동질 사회에서 나타나는 개인주의를 1세대 개인주의(개인은 민족 정체성이라는 온전한 정체성을 갖는다.)로 부른다. 1960년대 이후 등장한 정체성 정치의 개인주의는 2세대 개인주의(개인은 여성, 장애인 등의 차이 나는 정체성을 갖는다.)이며 그리고 다원화 사회에서 나타나는 불안정한 정체성의 개인주의는 3세대 개인주의다. (개인은 우연성의 감각 속에서 정체성을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으로 경험한다.) 이러한 세 가지 개인주의는 시대가 바뀌면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공존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정체성 물음을 만들어 낸다. p.38-39
민혜님이 얘기했던 것처럼 세대에 따라 고통의 정체가 달라지고 같은 민족으로 정체성을 형성한 만큼 식민지 시대에 대한 아픔과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성별에 따라 받게 되는 생물학적인 고통이 있기도 하고 느낄 수 없는 고통이 있기도 하죠. 마지막으로 요즘 고통의 화두는 태도에 따라 다원화 사회에서 겪게 되는 여러 상황으로 인해 생기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각자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 누군가 소외되면서 고통받고 있는 현상이 떠오릅니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정보 속에 자신의 정체성 또한 변하고 있다는 것이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위 문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떤 하나만의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고 있고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내면서 조합을 이루어 총체적인 개인의 고통이 됩니다. 이때 개인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고통의 정체 또한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어떤 고통인지 알 수 없다면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개인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는 것이 먼저라고 얘기할 수 있죠. 결국 민혜님이 얘기했던 자극을 통제할 수 없지만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과 연결되어 있을 것 같아요.
개인의 정체성도 깨달았고 고통의 정체와 그에 대한 대응도 알았다고 했을 때 없어지지 않는 고통이 바로 '외로움'이라고 이해됩니다. 절대 없어지지 않는 고통이 있어 우리는 '연대'라는 해결책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도 <철학책 독서 모임> 중에 아래 문장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어요.
플라톤과 칸트를 따르는 많은 철학자들은 인류 보편의 공통된 본성을 이론적으로 인식해야만 합리적이 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올바른 실천적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로티는 우리가 동일한 본성, 동일한 세계관,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p.84
개인적으로 로티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동일한 부분을 찾을 수 없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쇼펜하우어도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 있다고 하는데 고통은 살아있다면 피할 수 없는 존재겠죠. 그렇다면 조금 그 고통이 덜하도록 '연대'하는 것만이 답이라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듭니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가 가족이었고 아주 예전에는 부족 단위로 같이 음식을 공유하고 생활을 했던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연대'의 범위나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족의 단위가 아닌 형태를 찾아보는 시도가 필요하고 동시에 커뮤니티를 활용한 경우가 많아지고 있어요. 앞으로도 어떤 형태가 있을지 궁금하고 계속 지켜보고 싶어요.
그래서 그런 의미로 민혜님과 제가 그런 '연대'를 느낄 수 있는 기획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있는 거죠. 아주 가깝게 다가가지 않지만 주변에 산뜻하게 부는 바람 혹은 향기로운 꽃향기처럼 은은하게 사람들에게 스며드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민혜님의 목소리를 활용하면 그 답이 어렴풋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앞으로 계속 이야기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