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답장
유정님에게
고통을 주체적으로 겪어내기 위해서는 정체성의 발견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무척 공감해요. 존재의 작동방식을 알게 되면 외부의 자극은 그것이 무엇이건, 얼마나 강력하건 궁극적으로는 내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경험의 확장으로 볼 수 있을 거예요. 비록 어떤 고통은 나를 파괴할 만큼 지독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만 비로소 드러나는 비밀과 지혜가 있다고 믿거든요. 고통을 무작정 피하기보다는 긍정해야 하는 이유라 생각해요. 또 나에 대해 잘 알수록 위기 대처능력도 향상될 거예요. “개인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고통의 정체 또한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고통인지 알 수 없다면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를 수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셨듯이요. 이 부분까지는 온전히 동의합니다. 하지만 과연 시대의 정체성이 시대의 고통을 생산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언급하신 책에서는 민족, 정치, 태도로 정체성의 물음을 정리했죠. 책의 내용처럼 민족적 동질성의 1세대 개인주의, 정치적으로 차별되는 2세대 개인주의에 더해 “우연성의 감각 속에서 정체성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경험하는” 3세대 개인주의까지, 역사상 가장 복잡한 다원주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정체성 탐색에 있어 불리해 보이는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복잡해진 만큼 오히려 가장 근원적 고찰의 단계에 도달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고정된 정체성을 탈피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본질에 가까워진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시대적, 민족적, 정치적 정체성이란 사실 일관성이라는 허구의 옷을 입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 같아요. 인간은 박제된 역사책의 존재가 아니잖아요. 현실에는 오직 매 순간 숨 쉬고 인식하고 반응하는 개인이 있을 뿐이죠. 역사가 기록하지 않을 뿐 모든 시대의 개인은 정체성에 관한 위의 세 가지 질문을 동시에 직면했을 거예요. 역사와 정치가 아무리 깔끔히 정리하려 시도해도 민족, 정치, 태도는 계속 변하니까요. 따라서 시대적 정체성은 일종의 허구이고, 그에 따라 고통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공허하다 생각해요. 내가 모르는 고통을 남이 알려줄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적어도 진정 겪을 가치가 있는 고통은 철저히 현재적이고 개인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요.
또 한편으로 존재의 보편적 불안과 고통은 시대를 초월해 존재했고, 그 증거가 바로 문학이겠죠. 신기하게도 역사가 기록하는 시대적 차이에 비해 문학이 기록하는 개인의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자극의 양상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고통의 양상은 비슷할까? 저는 그 해답을 고전에서 찾았어요. 고대 그리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비극의 등장인물과 배경은 바뀌는데, 비극이 담는 고통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거든요. 기술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비극이 질적으로 진보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시대적 정체성은 바뀌고, 최고의 비극은 시대별로 투표가 달라질 테고, 톨스토이는 불행한 집은 저마다의 다른 이유가 있다고 했지만, 결국 인간의 본성과 기질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래서 고통은 주관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것 같아요. 만약 고통의 보편성이 없다면 고전이나 종교는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래서 고통을 주체적으로 경험하려면 이러한 주관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인 고통의 본질을 깨닫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고통이 자극 자체가 아닌 반응의 결과이고, 그 반응은 내가 선택한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겠죠. 나를 정확히 알아야만 고통의 주관성과 보편성을 구분 지을 수 있을 거예요. 나를 안다는 것은 민족적, 정치적 정체성 이전에 나의 피부, 오장육부, 마음과 감정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찾는 정체성의 탐색은 그 이후에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대적 정체성은 유령과 같다고 생각해요. 실재하는지 알 수 없고, 적어도 누군가 규정한 시대적 정체성에 따른 고통을 모두가 같은 질과 양으로 겪지는 않았다고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타인의 고통을 미루어 짐작하기란 불가능하지 않나요. 누군가가 규정해주는 고통이 진짜 내 것일까요? 결국 경험이라는 자신의 유리창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다만 상상할 뿐이죠. 세상으로부터 주입된 허구의 고통을 벗어버리고, 나만의 의미 있는 고통을 주체적으로 경험하며 성장하는 판단력과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리하자면 시대적 정체성은 고통의 표면적 차이를 만들어낼 뿐, 오직 순간을 살아내는 개인의 실존적 고통이 본질이고, 실존의 고통은 시대적 정체성이 아닌 본성과 기질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나아가 개인의 고통은 주관적이지만, 개인은 혼자가 아니라 전체라고 생각해요. 피에타나 그리스 고전이 증명하듯 인간이라는 종이 공유하는 보편적 고통이 있기 때문이죠. 이 고통을 이해할 때 비로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감각이 솟아나는 것 같아요. 시대를 초월해 개인이 집중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는 이 보편적 고통이 아닐까요. 마치 각자의 강물에서 각자의 노를 열심히 젓다보면 어느덧 바다에서 만나듯, 각자에게 주어진 자극과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하나씩 탐색해 가다 보면 보편적 존재의 고통을 마주하게 되리라 생각해요.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글이 길어졌네요. 며칠 전 3박 4일간의 산행을 다녀왔어요. 해발 3천 미터에서 캠핑을 하고 하루 8시간씩 걷는 여행이었죠. 처음 만나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대화를 했어요. 험준한 산을 오르고 고생스러운 캠핑을 하며 나누는 대화는 허물이 없더라고요. 각자의 취향, 어린 시절, 꿈, 종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서로 다른 삶들이 만나 충돌하고 화합하며 풍경과 어우러지는 모습이었어요. 자연을 즐기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는데, 대화와 사람을 얻고 돌아왔죠. 정작 대화의 내용을 보면 서로 그렇게 상극인 사람들이 없는데, 지나고 보니 중요한 건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 자체, 함께 끝까지 걸었다는 것 자체더라고요. 산에서 내려온 후 인터넷이 연결되자마자 유정님의 편지를 발견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조용한 기쁨을 느꼈어요. 산행을 통해 내가 누구와 어떻게 연대하고 싶은지에 관해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에요.
저는 함께 걸으며 대화하고 싶어요. 누구인지, 어떤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일단 함께 걷는 거예요. 임의의 목적지를 정하고, 거기까지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어요. 신을 믿건 안 믿건, 페미니스트 건 아니건 상관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불가능한 하잖아요. 중요한 건 공감의 크기가 아니라 서로 다치지 않게 배려하며 끝까지 함께 걷는 거예요. 내 곁에 걷는 사람이 그 누구라도, 활짝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이야기를 건네고 싶다, 서로 의견이 다르고 비판을 받아도 상관없다,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고 강하게 하는지 깨달았죠. 그런 마음이 생겼을 때 다리의 통증과 발의 물집 같은 분명한 고통이 희석되는 경험도 했고요. 내가 가장 강해질 때는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대화를 할 때구나, 내가 기꺼이 그런 마음을 가지면 어떤 투명한 보호막이 펼쳐지듯 어떤 자극도 나를 크게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는구나. 고통을 주체적으로 경험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일상 속에 찾아온 작은 깨달음에 흥분해서 이 글을 썼어요. 바다의 존재를 깨닫는 것, 내가 속한 종을 이해하는 것, 더 나아가 다른 종까지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 제가 할 수 있는 연대는 오직 그것뿐인 것 같아요. 마주 앉아 불가능한 공감에 연연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한 함께 걸으며 사랑으로 끌어안기.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강하고, 고통을 주체적으로 경험하며, 타인과 삶을 긍정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혼자만의 생각의 미로에서 한참 헤매며 글을 쓰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정님께서 제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하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제게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하고, 세상과 연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시네요. 저는 몇 차례의 편지를 교환하고도 우리가 여전히 행복이 아닌 고통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고통의 경험으로부터 길러 올린 작은 깨달음인 것 같거든요. 덕분에 처음으로 제가 가진 진주를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되었네요.
민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