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편지
민혜님에게
<철학책 독서 모임> 책 내용을 따라가는 것 같은 편지를 쓰게 되네요. 고통은 주관적인 동시에 보편적이라는 내용은 마치 낭만주의와 계몽주의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계몽주의는 답이 있다는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보편적이라고 한다면 낭만주의는 개인의 가치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는 잘 모름. 저만의 해석일지도ㅎ)
낭만주의 운동은 서구 세계의 삶과 사유를 이루는 "지배적 모형"에 심대한 균열을 일으켰으며 그 균열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벌린이 덧붙이듯 "낭만주의의 위대한 성취는 인간사 대부분의 다른 위대한 운동과 달리 우리의 특정 가치들을 매우 심원한 수준에서 변모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111
당대 지배적 사상이었던 계몽주의만이 아니라 서양의 합리주의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가치다. 첫째, 모든 진정한 질문에는 해답이 있다. 둘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셋째, 모든 해답은 양립 가능해야 한다. ... 계몽주의자는 훈계하는 조랑말에 가까웠다. 112-113
고통이 자극 자체가 아니고 그에 따른 반응이라는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어요. 그 반응을 내가 선택한다는 것도 말이에요. 올해 들었던 문장 중에 '내 기분은 내가 정해'가 있었어요.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 버리면 개인의 정체성보다 조직의 정체성을 따라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무언의 압박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조직의 보편적인 특징이 개인에게 스며들게 되죠. 개인의 정체성은 희미해지고 조직의 정체성이 마치 그 자리에 원래 주인처럼 행세하며 기분을 좌지우지했던 경험이 저에게도 있어요. 예전 회사에서 나오면서 조직 안에서 내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회사를 나온 이유 중 하나도 그 안에 있으면 내가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나에게 주어지는 자극을 예민하게 알아채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자극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외부의 입력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길을 걸을 때 풀내음, 햇살, 새소리,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말, 사무실 공기와 같은 것이 있겠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자극을 받는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반응은 천차만별이죠. 고통은 내가 선택한 반응이라는 말처럼 어떤 자극이 나에게 어떤 절차를 거쳐 고통이 되는지 구체적으로 경로를 설명해보면 어떨까요. 그 경로를 차단할 수 있거나 고통의 자극 자체를 멀리하는 등 다양한 해결책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길이 막힌다고 했을 때 어느 쪽 교통량이 많은지 차선을 넓히면 되는 것인지 신호등 시간을 바꿔야 하는지 등 상세하게 파악해야 알맞은 해결책이 나올 수 있는 것처럼요.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연대를 할 수 있다고 민혜님이 얘기한 부분에서 최근에 고통을 느낀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사실 고통이라기보다는 연대에 대한 의문이 맞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똑같은 현상에 대해 똑같은 반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바로 아이들의 유치원 준비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미 저번에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저도 정리가 필요해서 짧게 남겨봐요.
아이들 보호자라면 누구나 이런 부당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인지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일반 유치원 진학에 떨어져서 어렵게 거리가 먼 유치원에 가거나 혹은 영어 유치원과 같이 비용이 많이 드는 유치원에 가게 되는 수고를 하더라도 말이죠. 정부에서는 출산 장려를 하겠다는 구호를 내세운 지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이를 키우는 인프라는 확충되지 않은 채 철저하게 보호자의 책임과 희생에 의해 운영되고 있더라고요. 저는 몰랐어요. 실제로 아이를 키우고 이런 상황에 내던져지기 전까지는요.
어쩌면 이런 상황이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패배감이나 허무함이 자리 잡을 수 있어서 피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아니면 고통에 대해 반응을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 자신의 탓을 하게 되며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부모 행세를 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해석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문제를 피하지 않기로 했어요.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자 서로 연대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번외로 민혜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문학이 보편적인 고통에 대해 잘 표현한다는 것을 철학자 리처드 로티도 똑같이 이야기했더라고요. 그래서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 관심이 가요. 언젠가 읽어보겠다는 다짐도..ㅎ
철학자 니체는 1881년 가을에 쓴 유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학파들과 그들의 경험은 우리의 정당한 소유물이다. 우리가 전에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적 해결책을 통해 유익을 구했다고 해서 스토아학파의 해결책을 차용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좋은 삶의 방식이 다양하고 무수히 많다면, 철학은 유일무이한 삶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다양하고 무수한 삶의 방식들을 포괄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매몰되지 않는 시야가 필요하다.
비록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전통적인 의미의 철학이 아니라, 문학, 특히 소설이 이런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로티 자신이 여러 철학적 글쓰기를 통해서 그렇게 하듯 철학의 할 일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128-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