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답장
유정님에게
이곳의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나무를 잠식한 기생식물을 많이 발견해요. 새가 옮긴 작은 씨앗에서 발아한 기생식물은 원래 있던 아름드리나무를 고사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죠. 처음에는 눈살이 찌푸려지더라고요. 다른 존재의 희생을 전제하는 생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죠. 하지만 한 나무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곧고 높게 뻗은 근사한 나무인데, 나뭇가지에 온통 가시가 뒤덮여 있었어요. 가시는 가지에 새가 앉지 못하게끔 해서 기생식물의 침투를 방지하려는 나무의 생존전략이었던 거예요. 외부의 자극과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게끔 진화한 존재의 증거가 숲 곳곳에 있었어요. 거기엔 생존이 있을 뿐 어떤 보편적 선도, 악도 없었죠. 기생식물은 탐욕스러운 존재일까? 나무는 기생식물을 증오할까? 새는 아무 책임이 없을까? 그럼에도 숲은 왜 평화롭고 아름답지? 인간의 관점으로 숲을 바라보려니 머리가 아팠죠. 하지만 관점을 포기하고 바라보면 치열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현상 이면에는 새도, 나무도, 기생식물도, 그저 무심히 존재하는 고요한 당당함이 있었어요. 내가 여기 있노라, 나는 그저 존재한다.
연대와 변화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매일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죠. 어쩌면 유정님이 일으키는 변화의 혜택은 우리가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일지도 몰라요. 아마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 문제가 지금까지 회피되고, 표류하다가, 결국 우리 주변을 잠식하게 되었겠죠. 문제를 회피하는 사람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탓할 수만은 없어요. 반대로 대의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정면돌파를 하는 사람에 대한 보상은 약속되지 않죠. 어떤 사람은 안락함 속에서 가장 자연스럽지만, 어떤 사람은 위기가 닥쳤을 때 잠재력을 발휘해요.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떠한 방해도 없이 자극에 대한 반응을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즉, ‘이 변화를 진정 원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하다면, 방법이나 결과는 중요하지 않을 거예요. 여태껏 유정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왔다면 과거를 후회할 필요도, 자책하거나 비판에 귀 기울일 필요도 없어요. 숲 속의 나무들이 후회하지 않듯이. 지금 당면한 문제가 오히려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리라 믿어요. 어쩌면 그러한 전환점을 유정님 스스로 설계한 것일지도 몰라요!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의 대화에서도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공존해요. 고통이 철저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다분히 낭만주의적이고, 고통의 보편성을 탐색하자는 주장은 계몽주의적 시도로 볼 수 있겠죠. 다만 언급하신 책에서 “훈계하는 조랑말”이라고 지칭한 과거의 계몽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의 단단한 토대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관점의 가능성, 아니 필요성을, 저는 탐색 중인 것 같아요. 새로운 관점이란 개개인이 각자의 본성과 기질대로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되, 필요에 의해 일시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개인과 사회의 유연한 관계를 긍정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예를 들어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연대했다가 목적을 달성하면 다시 해체하는 것이죠. 그리고 연대는 오직, 보편적 고통을 공유할 때에만 가능할 거예요.
숲에는 모든 이즘(주의)이 존재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어떤 설명이나 해석은 하나의 관점에 불과할 뿐, 숲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죠.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나의 관점으로 시대를 설명할 수 없고, 하나의 관점은 결코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죠. 빛과 그림자처럼 양면성을 지닌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해요. 다만 학문적 필요에 의해 마치 순차적으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등장한 것 같은 착시효과를 일으킨다고 생각해요. 시대의 필요에 따라 하나의 관점이 득세하고, 시간이 흘러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른 관점이 부상하는 일련의 흐름을 읽는 것이 곧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겠죠.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등장했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이제 다시 새로운 관점의 시대로 접어드는 과도기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과연 그런 거대한 트렌드 속에 모든 개인이 존재할까요?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이 시대적 트렌드를 포착하기란 불가능할뿐더러, 불필요한 것 같아요. 이러한 해체적이고 탈중심적인 사고 자체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영향일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모든 시대의 모든 개인은 일정 부분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닐까요.
개인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에 태어난 개인의 역사에도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공존한다는 점이 더욱 흥미로워요. “나는 계몽주의적 교육을 받았지만 개인적 공부를 통해 낭만주의의 필요성을 이해했고,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 있다”라고 개인의 역사를 서술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초등학교 때 일기를 다시 읽으면,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는 것과 같아요. 다른 시대, 다른 개인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물론 환경에 따라 다른 순서로 경험할 수도 있겠죠. 마치 어릴 때는 낭만주의 음악을 좋아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고전주의에 심취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요. 중요한 것은 순서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습득하며 장단점을 체험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경험되는 나를 찾는 것 같아요.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서 한 번 찾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환경을 습득하고 변모하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위기를 대하는 태도, 권태를 대하는 태도 속에 나는 존재하죠. 그래서 위기와 권태를 겪어보지 않으면, 그만큼의 나를 놓치는 것이라 생각해요.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나는 시시각각 드러나고 창조되므로,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유정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극을 알아채고 반응의 경로를 탐색하는 과정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저의 경우 즐거움의 경험은 나를 부풀리고 잊게 하지만, 고통의 경험은 가장 선명하고 정확하게 나를 대면하게 해 주더라고요.
그렇게 발견한 “나”는 에고가 아니라, 반응하는 에너지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에고는 일종의 자의적 관점이기에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지만, 에너지는 관점이 없기에 오직 최선을 다해 환경에 반응할 뿐이죠. 자극에 대한 반응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각자가 지닌 에너지 고유의 색과 운동성으로 자극에 변화무쌍하게 반응하는 상태, 즉 에고가 가진 기억도, 두려움도 개입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말과 같아요. 기억이 없기에 환경을 통제할 수 없고, 두려움이 없기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죠. 본성과 기질에 충실한 상태란 이 에너지의 순수한 운동성을 긍정하는 상태예요. 그래서 저는 환경 통제보다는 심리적 접근이 더 유효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가장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환경을 통제하고픈 본능 역시 누구나 갖고 있기에,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일상과는 별개로 역사가 보편적 고통, 보편적 선이라는 공통주제의 변주라고 생각한다면, 기술문명과 자본주의 속에서 해체되고 파편화된 지금의 개인은 허무와 고독이라는 보편적 상황에 직면했다고 볼 수 있겠죠. 선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마음이 본성적인지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보편적 고통의 경험이 누적되면 많은 이들이 보편적 선의 필요를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포스트모더니즘의 허무와 고독으로부터 새로운 이상과 낭만을 꿈꾸며, 이제 역사는 어떤 대안을 찾게 될까요. 물리적 개인은 고립됐으므로, 영성과 집단 무의식, 정신적 연대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의 대화가 이러한 가설의 좋은 실험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추신: 방울토마토가 빨갛게 익었어요. 오늘 첫 수확을 하며, 이 편지를 시작할 때 썼던 예감이 실현되는 기쁨을 누렸답니다. 최선의 예감을 담아, 모든 위기를 전화위복으로 만들어 보자고요.
민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