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베이스캠프
중국팀이 정상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국팀 성공이 고마운 게 아니라 이젠 우리가 등반할 수 있다는 게 다행.
순수 중국인으로 구성된 원정대의 첫 등정은 실패하고, 두 번째 때 셀파의 도움으로 성공했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아침마다 베이스캠프 아래에서 올라온 진한 군무가 뒤덮는다.
몬순이 오는 징후다.
구름안개를 보니 마음이 더 다급해진다.
텐트 안 장비를 다 끄집어내 안전여부를 확인하고 공기마스크 작동여부 등 막바지 점검을 했다.
공기통은 대원 당 2개씩 배당되었다.
8,000m를 넘어 정상을 공격할 때 오를 때, 내릴 때 각각 한 통씩이다.
여분이 없으니 각자 사용량을 잘 조절해야 한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바로 옆에 있는 외국의 상업등반대는 이곳 베이스캠프는 물론이고 각 텐트마다 공기통을 놓고선 필요하면 마시는 여유.
이에 비해 우리는 없어 보이고 초라해 보인다.
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공기 한 통에 100만 원을 호가하니 이런 상황이다.
이렇게 빈약한 조건에서 우리가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모두 오를 수 있을까?
결전을 앞둔 대원들을 위해 베이스캠프로 찾아온 현지인에게 돼지 뒷다리를 샀다
5월 9일
베이스캠프
오늘은 네팔군이 다 철수한다.
그동안 등반을 금지시키려고 그들도 고소를 겪으며 고생했을 것이다.
종일 내일 운행을 위해 조마조마한 하루를 보냈다.
5월 10일
베이스캠프 → 제2캠프
길이 열렸다.
이제부턴 우리 몫이다.
어떻게 운행을 할지에 따라 대원의 안전과 성공이 갈린다.
우리 대원 4명과 셰르파 2명에 ABC 쿡까지 대동하여 제2캠프로 물자를 수송했다.
제2캠프에 도착하니 꽤나 번잡스럽다.
우리뿐만 아니라 국내의 많은 팀이 마지막이 될지 모를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데, 그 동선이 거의 같다.
사우스콜의 밤하늘은 시리도록 맑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하늘에 별이 밝게 빛나고 있다.
지금 우리 뒤로 8,848m 에베레스트의 검은 남벽이 거대하게 솟아 있다.
좌측으로는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 로체(8,518m)가 있다.
앞으로는 로체와 눕체가 연결되는 하얀 능선이 뻗어 있어 있다.
나는 그 안에 갇혀 있다.
5월 11일
제2캠프(6,400m) →제3캠프(7,200m)
나와 인호, 셰르파 도로지와 밍마는 제3캠프로 물자수송 겸 현지적응차 운행한다.
고소 적응이 덜 된 기호와 경호는 하룻밤 더 제2캠프에 머물기로 했다.
제3캠프로 오르는 얼음벽이 상당히 높아 긴장감이 바싹 돈다.
한참 주마질을 하다가 뒤를 돌아보면 얼마나 아찔한지.
혹여 여기서 떨어지면 어디에 처박힐까?
사람들이 내가 떨어진 곳을 알수 있을까?
계속 호흡이 거칠어서 연신 푹푹소리를 낸다.
오를수록 공기가 희박하다는 증거다.
20발자국을 한 번에 넘기기가 힘들고 계속 기침이 난다.
이럴 때 공기 좀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 거칠어진 목구멍에 따뜻한 물을 넣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바로 몇 미터 뒤 인호가 말 없이 잘 달라붙어 따라온다.
이미 적응된 셰르파는 저만치 앞서 가버렸다.
한 번씩 훑고 지나가는 강풍이 올 때면 밧줄에 매달려 바람 반대 방향으로 쭈그려 앉아서 바람이 지나가기만 바랄 뿐이다.
이번 등반기간 중 가장 힘든 날이라 생각했다.
처음 맞딱뜨린 고도와 경사지에 난이도까지,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제3캠프 이후 제4캠프, 그리고 정상까지 가는 길은 더 심해지겠지.
죽어라 도착한 제3캠프는 초라했다.
급격한 설사면에 작은 텐트가 달랑 하나, 식량이라고는 통조림 4개와 비스킷, 에너지바, 건포도가 전부였다.
도착하니 도로지가 아이젠을 절대 벗지 말라고 알려준다.
경사가 심한 설벽이어서 미끄러지면 그대로 수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한다.
몽롱하고 약간의 두통이 있지만 나름 모든 상황을 인식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인호도 괜찮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베이스캠프로 헬기가 여러번 다녀갔다. 대부분 긴급환자 수송, 이곳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인간에게 불리하다
5월 12일
제3캠프(7,200m) → 제2캠프(6,400m)
아침에 따뜻한 물, 차와 약간의 비스킷으로 식사를 하고 제2캠프로 내려왔다.
역시 내려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오를 때 그토록 길고 험난했건만, 같은 길이 이리 가벼울 수 있을까.
이런 느낌은 고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시간 여유만 있다면 제4캠프(8,000m)까지 고소순응을 마치고 정상공격을 시도했으면 좋으련만, 시간이 부족하다.
제3캠프(7,200m)가 최고의 고소순응 지점이니 아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
실패와 성공의 갈림길만이 있을 것이다.
단지 사고가 없기를 바랄뿐이다.
제2캠프로 내려와 점심을 먹고 인호는 베이스캠프로 내려 보냈다.
하루 쉬면서 로체 등반 준비를 마치고 다시 올라오라 했다.
나 또한 베이스캠프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내려갔다가 다시 제2캠프에 올라 인호의 로체 등반을 챙기고, 다시 베이스캠프로 내려가 내 등반 준비를 하고, 다시 제2캠프로 올라오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며칠 마음 편하게 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5월 13일
제2캠프
모처럼 혼자다.
푸른 하늘을 보다보면 빨려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다.
구름 한 점 없고 바람 한 점 없다.
고요와 적막감을 딱 느끼기 좋은 아침.
상게와 커피 한 잔 마시며 고향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얼마나 따뜻한 봄날일까?
가족들은 잘 있겠지?
혹 나를 생각하며 불안해하지는 않을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역시 산에서는 바삐 움직이고, 땀 흘리고, 허기지고, 그러나가 밤에는 바로 곯아떨어지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여윳시간 있어봐야 마음만 허하다.
오후 늦게 베이스캠프 인호와 통화한다.
내일 장비 잘 꾸려서 이곳으로 올라오라 했다.
5월 14일
제2캠프
점심시간이 지나서 인호가 올라왔다.
경호와 기호는 제1캠프에 머무른다.
이번 등반은 당초 나와 기호가 에베레스트, 인호와 경호는 로체를 오르는 운행조를 편성했었는데, 기호와 경호가 컨디션 난조로 등반이 어려워서 나와 인호가 각자 홀로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오르게 됐다.
에베레스트와 로체 두 봉우리를 같이 오르면 좋겠지만 조건이 안 됐다.
혹시나 두 곳 중 어느 한 곳에서 사고가 날 경우 대처법을 생각해본다.
짧은 시간이지만 우선 인호의 로체 공격을 챙기고, 상황을 봐서 에베레스트를 올라야 할 것 같다.
우리 팀은 내가 8년전 히말라야 초오유(8,201m)에 오른 경험이 유일하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와 세계 4위 로체(8,518m)를 도전하는 것 자체가 애초 무리였나?
돌아갈 길은 없고 선택할 이유도 없다. 건너야 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5월 15일
제2캠프
오전 9시, 인호가 로체 등반을 위해 제3캠프(7,200m)로 출발하는 날이다.
나는 인호와 제2캠프 설원평야까지 동행하는 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이제 보내면 내일 정상공격을 할 것이고, 그날 성공여부가 결정나겠지.
하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비춰질까봐 아마 말도 할 수 없었다.
악수와 짧은 포옹을 했다.
힘들고 어려우면 미련두지 말고 내려오라고만 간단하게 말했다.
돌아서서 진행하는 인호의 뒷모습을 보니 콧등이 찡했다.
허공을 보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곳에 온 이래 이렇게 불안하게 헤어진 것은 처음이다.
인호의 셋째 아이가 며칠 전 태어났다.
등반 성공보다 인호의 안전이 더 걱정이다.
오후가 넘어 무사히 제3캠프에 도착했다는 무전이 왔다.
긴장을 풀고 여유있게 마음먹고 하는 데 까지만 하자고 말했다.
나는 6일째 베이스캠프를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
체력이 소진되는게 느껴졌다.
인호의 안전을 확인하면 바로 베이스캠프로 내려가 체력을 보강하고 에베레스트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내가 인호의 로체 등반을 제2캠프에서 지켜보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리팀 능력을 볼 때 사고발생 시 대처와 수습이 어렵다.
아무래도 고지에서 가까운 제2캠프가 그나마 안심이다.
둘째는 떠나올 때 만삭인 인호 부인을 보며 속으로 약속한 게 있다. 꼭 안전하게 같이 돌아오겠다고.
아직 해가 많이 남은 오후, 안전하게 제3캠프에 도착했다는 인호의 무전이 반가왔다.
며칠 전 고소적응 훈련이 효과가 있나보다.
제3캠프 급경사지 설사면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5월 16일
제2캠프
아침에 인호가 로체 제4캠프(7,800m)로 오른다.
상게가 텐트 앞에서 정성스레 향을 피운다.
여기가 작년 에베레스트 남서쪽 신루트를 개척하다가 사망한 오희준 대원과 김현조 대원의 씨의 길이어서 더 정성이 담긴다.
인호의 운행은 다행히 다른 팀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같이 움직인다고 한다.
셰르파 밍마에게도 인호와 항상 같이 움직일 것을 당부한다.
밍마는 참 순진한 셰르파다.
셰르파 나이치곤 많은 편이고, 얼굴로만 보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인다.
하지만 그만큼 노련미가 있고 성실해 믿음이 간다.
인호는 체력이 대단하다.
왜소해 보이지만 끈기와 인내, 근성이 대단하다.
이날 계획대로 제4캠프에 무사히 진입했다는 무전이 왔다.
일기예보는 내일까지 좋다.
우리팀 셰르파와 외국 상업등반대 셰르파의 협력으로 일기예보는 수집하고 있다.
외국 상업등반대는 에베레스트 사우스콜 제4캠프(8,000m)까지 일기예보 기상장치를 설치했다.
우리와 비교하면 최첨단 장비와 풍부한 물자를 갖춘 신식 원정대다.
오후 11시, 제4캠프로 무전을 보낸다.
간단히 누룽지로 요기하고 밍마와 출발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요한 밤이다.
등반 중 힘들면 아무 걱정말고 돌아오라는 당부를 또 했다.
제2캠프 정면 로체와 왼편 에베레스트 남서벽이 검은 눈으로 우릴 주시한다
5월 17일
제2캠프 → 베이스캠프
밤새 한 숨도 못 잤다.
잠이 오지도 않고, 잘 수도 없는 상황.
등반 중인 대원에게 상황을 물어볼 수도 없고, 오로지 무전만 기다리는 게 내가 할 전부였다.
새벽이 지나고 날이 밝아올 때 로체의 골짜기능선을 올라섰다는 무전이 왔다.
다행이었다.
텐트 밖으로 나와 로체를 바라본다.
멀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현장이 눈에 선하다.
거친 숨소리만 가득 가득 하겠지.
또 다시 무전기를 들고 정상에 무사히 올랐다는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시간.
시간이 참 더디다.
삼십 분이 하루 같다.
때가 됐는데 무전이 없으면 더 불안하다.
혹시 사고?
오전 10시가 넘어서 오는 무전도 불안하다.
성공 또는 실패의 결과를 통보받아야 한다.
무조건 좋은 생각만 하면서 기다린다.
오전 11시를 넘길 때 치지직~ 무전기가 울린다.
자그마한 텐트 안에서 7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님, 로체 정상입니다.”
기쁘고 다행스런 소식이다.
같이 오른 김재수 대장, 고미영 대원, 그리고 경기연맹팀 모두 무사히 등정했다는 소식이다.
연신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또 내려올 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산행 사고 상당수가 오를 때보다 내려걸 때 발생한다.
그리고 치명적이다.
정오가 다가올 때 하산한다는 무전을 받고서야 상게와 점심을 먹었다.
이제는 내 차례다.
에베레스트를 올르는 마지막 관문이다.
상게에게 내려오는 대원을 잘 챙겨주라 당부하고 베이스캠프로 내려갔다.
베이스캠프에서 몸을 추스르고 올라와야 한다.
오늘까지 꼬박 7일을 제2캠프와 제3캠프를 오가며 지냈더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
줄달음쳐 베이스캠프로 향한다.
처음에 그토록 무서웠던 아이스폴 구간 크레바스에 걸치 사다리를 내달리듯 건넜다.
고소에도 완전 적응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마치 고향집에 온 느낌이다.
오후가 지나고 제2캠프와 무전이 잘 안 된다.
무사히 내려와야 할 대원들 소식이 아직 없다.
오후 6시 해질 무렵 무전이 왔는데 경기연맹팀 대원 1명이 실종됐다는 소식이다.
우리팀은 무사히 제4캠프로 내려왔다.
경기연맹팀 숙소로 찾아가 상황을 파악하고 수색에 동의했다.
우리팀 셰르파에게 경기팀과 같이 실종자를 수색할 것을 지시했다.
밤은 다가오고, 초조하게 무전만 기다린다.
고산에서 실종은 죽음을 생각해야 하니 마음이 무겁다.
한국팀 막사가 어수선하다.
지금까지 사고 없이 잘 해왔는데, 이제 마지막 등정을 마치면 끝인데, 이런 일이...
신의 가호가 절실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