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베이스캠프
오늘은 컨디션 조절과 장비 점검을 위해 휴식이다.
날씨 걱정은 더 이상 안 한다.
비 쏟아지다가 맑아지고, 맑았다가 다시 퍼붇기를 반복하는 게 일상이다.
내일 정상 공격 때 날씨는 오직 신만 알고 있을 뿐.
공연한 날씨 걱정 대신 카메라와 비디오 배터리와 작동상태를 점검하는게 낫다.
내일부턴 암벽등반도 있어서 여러 장비를 꼼꼼하게 살폈다.
오늘은 그동안 정이 많이 든 프랑스 친구 프랑수아와 네이드와 시간을 보내며 우애를 다졌다.
특히 네이드는 여러 면에서 동양인 산악인인 나를 존중하며 신뢰를 쌓았다.
나 역시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산악인으로 존중했다.
네이드는 틈만 나면 내게 웃음 띤 얼굴로 말을 건네고, 취침 전에는 자신의 텐트에서 큰 소리로 '굿나잇, 알러뷰 손!' 이라고 외치고 했다.
재밌고 좋은 친구다.
왼쪽부터 프랑수아, 네이드, 나
이날 장비점검과 함께 그동안 밀린 빨래도 하면서 편안한 하루를 보냈다.
세븐 서미트의 성공을 위해 마음을 차분하게 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11월 20일
베이스캠프 - 정상
한 새벽, 오전 2시에 정상 공격을 시작했다.
달이 떴지만 달무리 때문에 하늘이 뿌옇다.
첫 고개를 힘겹게 넘으니 웅장한 칼스텐츠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숨이 막힐 정도로 위압감이 넘쳐 흐른다.
고개를 한참 졌혀 올려야 하늘과 맞닫는 능선이 보인다.
어두운 밤이어서 그런지 더 높고 가파르게 느껴진다.
마치 거만한 거인이 우리를 억누르며 내려보는 것 같다.
초입으로 들어서니 낙석 떨어지는 연신 소리가 어둠을 가른다.
마음 속으로 제발 내 위로 떨어지지 말라고 애원해본다.
처음부터 암벽 등반이다.
거의 주마링(jumaring)으로 올라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인데, 가끔 벽에 찰떡같이 달라붙어야 할 때도 있어 긴장해야 한다.
* 주마링 : jumar라는 등강기로 로프를 타고 암벽을 오르는 기술. 주마는 스위스 등강기 제조사 브랜드 명칭이다. 영어권에서는 ascender라고도 한다.
예리한 암질의 날카로움이 엄청나다.
튼튼한 장갑을 준비한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흥미로운 암질이 매우 많다. 날카로워서 맨손으로 잡았다간 상처를 입는다
이런 상황에선 항상 깔려진 로프가 걱정이다.
이놈의 로프가 튼튼한지, 그동안 흠이라도 생겨 올이 터지진 않을지, 또 볼트나 하켄은 잘 박혀있을지.
당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또 긴장할 수 밖에 없다.
로프를 살펴보니 최근 설치한 새 것이다.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혹시나 하나가 잘못되면 굴비 엮이듯 모두 함께 천길 낭떠러지로 날아간다.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가 문득 생각난다.
여러 구간에 설치된 고정 로프가 오래된 것, 새것 여러 가닥이 있었는데, 어떤 줄을 믿고 잡아야 할지 난감했었다.
새벽 2시에 시작한 등반은 일출을 지나 오전 7시가 돼서야 암벽구간 능선상단에 이를 수 있었다.
이곳에 올라서니 동쪽 산맥 아래에 어마어마 한 크기의 광산이 보인다.
규모가 상상이상이다.
이곳 원주민이 광산에 적대적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뒤 바위 너머로 대규모 광산이 보인다. 능선길만 2시간 이상 올라와 본 광경이다.
능선은 그렇게 길어 보이지 않지만 중간에 도중 난이도 최고 수준의 티롤리언 브리지 (Tyrolean bridge)가 있다.
* Tyrolean bridge : 계곡이나 크레바스 양쪽에 로프를 걸고 도르래로 횡단하는 기술, 오스트리아 Tirol 지방에서 유래
이 구간을 통과하지 않고는 정상을 갈 수 없다.
800m 절벽 위에서의 외줄타기라니.
하~...
그래도 이 장면은 절대 놓칠 수 없는 영상 소스다.
카메라를 패킹하는 외국원정대와 달리 나는 비디오카메라를 하네스 옆구리에 장착하고 줄에 거꾸로 메달렸다.
30m는 족히 되는 길이다.
고도가 상당하기에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공포스럽다.
여기에 안개구름이 끼어 절벽하단이 끝 없는 것 같아 몸이 움찔거릴 정도로 오금저린다.
팔힘을 축적하려고 잠시 쉬었다가 크게 숨쉬고는 도르레를 박차고 나갔다.
반대편 바위에 무사히 도달하자 벌렁 누워버렸다.
티롤리안브릿지 구간. 건널 길이보다 발 아래 수백미터 절멱이 더 아찔하다.
이어서도 암벽능선 구간이 계속된다.
안자일랜과 주마링을 반복하다가 절벽도 두 번이나 더 건넜다.
힘이 부칠무렵, 드디어 정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조급하지 말자.
아직도 시간은 충분하다.
지금 맑은 하늘이 정상에 서는 그 순간까지 유지되길 바랬다.
최대한 의연하게 마음을 잡고 정상으로 한걸음씩 내딛었다.
이제 지난 14년 긴 시간을 마무리할 순간이 다가 왔다.
어느 순간 내 발걸음이 끝났다.
그곳은 칼스텐츠의 끝이었고, 내겐 7대륙 최고봉의 끝이었다.
발아래로 온통 구름바다.
이 때문에 하늘이 더 없이 푸른빛을 펴냈다.
무척이나 푸르렀다.
칼스텐츠가 이런 하늘을 몇 번 안 보여준다는데, 나에게 보여주는구나.
그토록 변덕스러웠던 칼스텐츠 하늘이 말이지.
내게 선물을 주는 것 같았다.
푸른하늘 속에서 나는 세계 7대륙 최고봉 세븐 서미트를 마치고 있었다.
숨가푸게 달려왔다. 직장, 산, 가정.
차가운 바위 위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 한참을 있었다.
그간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지난 시간 있었던 의미, 목적.
만족하며 행복했는가?
한참을 기다려도 답을 구했다.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을 위해 어느때보다 정성스럽게 사진을 담았다.
인도네시아 에이전시가 나도 모르게 내 세븐 서밋 성공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준비해와서 깜짝 놀랐다.
깜짝 이벤트를 준비해 준 친구들 때문에 감동이 배가됐다.
두손을 번쩍 올리고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는데도 후련치가 았다.
정상에서 많은 시간을 서 있었다.
세계 7대륙 최고봉의 종착지여서 그런가? 내려오고 싶은 마음이 나타나질 않는다.
아마도 여기서 내려서면 그동안 길고 길었던 그 목표가 사라지기 때문일테지.
히말라야 초오유를 실패하며 결심한 것을 목표로 꿈꾸며 14년을 달려왔으니.
그런데 이젠 종착역,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칼스텐츠를 내려 오는 내내 오로지 한 생각뿐이었다.
"이제 다 비워버린 마음 주머니에 또 무엇을 채우지?"
후기
칼스텐츠 등반 후 발리에서 며칠 보냈다.
칼스텐츠 성공을 끝으로 14년 긴 여정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을 마무리했다.
이것은 내게 기쁨일까?
오랜 시간 나의 영혼을 지배했던 꿈과 계획이 사라졌다
이제 나이 쉰을 앞두고 계획 없는 삶을 살아가는 처지가 된것일까?
혹시 다른 계획을 세운다면 내 안에 각인된 세븐 서미트 트라우마를 잠재울 수 있을까?
오늘 귀국길에 오르고, 나는 당분간 세븐 서미트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에 들떠 있을 테지.
그 기간이 지나면 난 다시 끝없는 방황을 할 텐데.
방향을 찾지 못하고, 얼마나 큰 동굴에 빠질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이 두려웠다.
칠흑 같은 밤중에 사방을 분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허나 이 방황은 내게 그런 분별을 허락하지 않을 터.
예고도 전조도 없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을 터.
그 불안한 불확실함은 조용히 나를 주시하다가 덮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할께 뻔하다.
그래서 수많은 모험가, 탐험가, 산악인, 극한 삶을 극복한 사람들이 여기에서 탈출하려다가 포기하고 다시 그길로 들어서는 것이겠지.
그러다가 자신이 원했던 삶 속에서 숙명처럼 생을 마치기도 하지.
고상돈, 우에무라 나오미, 이들의 과거나 유형의 이야기를 수없이 보고 들었지만 나 또한 그 길에 있었다.
나도 영원히 산을 떠나지 못할 숙명일까?
아틀라스처럼.
발리에서 귀환행사. 목표가 같았던 친구들과.
손영조의 세게 7대륙 최고봉 등정의 기록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읽어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꼭 경험하세요.
비록 후회할지라도.
여정의 끝이 될까? 새로운 시작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