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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Feb 10. 2024

왜 회사에서 사회운동을 하냐구요?

성평등 의제는 전통적인 노동조건과 분리될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노동조건이라고 불리었던 것, 즉 노동조합이 협상이나 투쟁을 통해서 획득하고자 하는 것들의 범위는 주로 임금과 노동시간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외에도 노동자의 인권에 관한 내용은 점점 확대되어 왔다. 이는 노동조건의 핵심과 주변으로 영역을 다룬 것으로, 노동자들이 사회운동의 영역에 있던 의제를 노동조합 조직과 사업장 안으로 들여온 것이다. 성평등 역시 전통적인 노동조건의 범위라기보다는 확장된 의제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과연 전통적인 노동 의제와 성평등이 이런 방식으로 분리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일까?      


성평등, 기후정의, 인권 등 사회정의는 노동조건과 분리되는 영역이 아니다. 성차별이 만들어낸 임금의 격차가 말해주듯, 성희롱이 퇴사 결심의 이유가 되듯, 함께 살던 파트너의 죽음에도 혈연·법률혼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애도를 위한 휴가를 쓸 수 없든, 기후위기로 인해 일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는 사람들이 있듯, 변화무쌍하고 극단적인 날씨 때문에 출근이 어려워지듯, 이 사안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중요한 노동조건이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럼 옆 자리 동료들과 무엇을 해야 할지는 쉽게 감이 오지 않는다. 어렵지 않게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실천을 생각해봐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걷기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예고되었던 어느 해 가을이었다. 이른바 투쟁사업장도 아니고 임단협 교섭 중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진짜로 파업을 할 수는 없었다. 이럴 때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우리도 뭔가 나름의 액션으로 총파업에 동참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평등길’이라는 이름의 도보행진과 마음을 같이 하여, 우리 사업장 근방에서 걷기를 실천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간단한 스티커 붙이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 걷고, 도시락을 먹고, 손피켓 인증샷을 찍었다. 차별금지법에 대해 지식과 관심의 정도가 천차만별이었겠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딱 한 발짝 앞으로 나간 액션을 기획한 덕에, 많은 참여가 이루어졌다. 출근한 조합원은 거의 모두 이 액션에 참여하는 성공적인 이벤트가 되었던 것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실천의 시작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일상생활에서 자주 느끼기는 하지만 노조에서 주제로 삼는 건 아마 생소한 느낌일 것이다. 일자리의 잔존 여부와 노동 방식의 변화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에너지 관련 업계나 제조업계의 노조가 아니라면, 큰일처럼 다가오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우리라고 그렇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독서 소모임에서 기후위기에 관한 책을 함께 읽는 것을 시작으로, 가능한 일들을 하나하나 시도했다. 송년회를 겸한 조합원 총회에서 사전행사로 ‘기후위기와 노동자’를 주제로 교육을 진행했다. 무엇보다도, 단체협약에 기후위기 대응 조항을 신설하고, 몇 가지 구체적 실천에 관한 노사합의를 체결했다. 회사가 할 일을 명시한 것이다.       

·탄소배출 저감, 에너지 절약, 자원 순환 등과 관련하여 사내에서 계획 또는 시행하고 있는 사항들(서울시, 중앙정부 지침에 따른 조치 포함)을 전 직원에게 공유한다. 

·운영하고 있는 건물의 시설 개선 계획 시 에너지효율을 높이는 방안을 우선적으로 포함시킨다. 

·기후위기 관련 교육을 필수교육으로 지정하여 교육학점으로 인정하고 교육 선정 시 노조와 협의한다. 

·연 1회 이상 정기적인 캠페인 등을 실시하여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고양한다. 

·직원이 일상 업무 및 행사 진행 시 포장개, 일회용품, 플라스틱 최소화, 친환경 소재 물품 사용, 자원 순환에 기여하는 업체 이용을 위해 노력하고, 이 실천에 모범이 되는 직원을 발굴하여 표창, 포상휴가 등에 적극 반영한다.      


사회 의제는 산별노조나 민주노총에서 공통 방침이나 교육 기회를 마련하기는 하지만, 내가 다니는 일터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더 많은 아이디어와 고민을 해야만 한다. 추상을 구상으로 만드는 작업은 맨 땅이 아니라 조그맣게라도 실천이 쌓였을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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