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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Feb 10. 2024

일터의 성평등 쟁점들

성평등은 일터에서 아주 중요한 가치여야 하고,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전반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개선이 되어야겠지만, 단체교섭을 통해 조합원들이 함께 고민하고 단체협약으로 결실을 맺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성평등 단체교섭, 성평등 단체협약 논의가 총연맹이나 산별노조에서는 최근 시작되었다. 그래서 산별노조가 각 사업장의 단체협약 가이드라인으로 제공하는 모범단협안에 성평등, 다양성 존중을 반영한 조항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모범단협안의 적용이 의무사항은 아니다. 상급단체가 제시한 모범단협안을 의무적으로 각 산하 조직에서 자기 단협 요구안에 반영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설령 반영했다 하더라도 사측과 합의되어 최종 결과물인 단체협약으로 체결되기란 쉽지 않다. 많은 조직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혹은 의지의 부족으로) 반영하지 못하기도 하는 한편, 어떤 조직에서는 상급단체가 제시한 모범단협안보다 더 높은 수준의 조항을 만들기도 한다. 대체로 아직까지 단체협약에서 여성의 권리를 모성보호로 협소하게 사고하는 경우가 남아있고, 성평등이라면 직장 내 성희롱 예방에 관한 규정이 전부라고 여기는 곳이 많다.  


내가 다니던 직장은 공식적인 지표로 가늠했을 때 상대적으로 우수한 성평등 수준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예를 들어 서울시가 시행하고 있는 성평등 임금공시제에 따르면 이 기관은 대부분의 투자출연기관과 달리 여성의 임금 평균이 남성 평균보다 높다. 그럴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상급자, 관리자의 여성 비율이 높은 데서 찾을 수 있다. (아직도 여초 직장의 특징을 빈번한 암투 또는 “여적여”라고 생각하거나, 여성 관리자는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몹쓸 편견을 갖고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 여성들이 상위 직급 관리자 포지션에 포진되어 있다고 해서 조직이 안 굴러가는 게 아니다.) 특히 기관의 존재 목적이 성평등에 있고 여성의 능력과 삶의 질을 높이는 사업들을 하다 보니, 관련한 지식과 인식의 정도가 타 기관들에 비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직원이 페미니스트로 자기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며, 인식의 개인차가 꽤 있는 편이다. 그래도 다른 기관들에 비해 유리하게 보이는 상황이지만, 성평등 단체협약이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3.8 세계 여성의 날 기념으로 나누어가진 빵과 장미


6년간 세 차례의 단체협약 체결이 있었고, 늘 단체교섭의 목표 중 하나로 성평등 강화를 내세웠다. 그저 향상이나 강화가 아니라 ‘선도적인’ 단협을 만들고자 했다. 다른 기관들도 우리 단협을 참고할 수 있도록, 그래서 성평등 수준을 다 같이 끌어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가 다루었던 몇 가지 중요한 영역으로는 가족 다양성 존중, 재생산권 보장, 젠더폭력 피해 지원의 범위 확대가 있다. 우선 가족 다양성은, 특히 근무시간, 휴가, 휴직에 관한 사항에서 다루고 있는 가족의 형태가 이성애와 법률혼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대한 비판에서 시작했다. 이런 기준은 사실 우리 노조의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많은 일터의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가족의 다양한 형태에 맞는다. 우리는 가족 형태에 따른 차별을 금지할 것을 ‘차별 금지’ 관련 조항에 명시하고, 배우자 사망 시에 사용하는 휴가 조항에서 배우자 범위에 법적 혼인 관계에 있는 사람 외에 ‘생활동반자’를 포함하도록 했다. 아이의 돌봄이 필요할 때 부모가 휴가를 쓸 수 있는 가족과 달리, 한부모 가족은 돌봄 휴가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적다는 점을 고려해서, 우리는 한부모 직원의 경우 유급으로 돌봄 휴가를 더 쓸 수 있도록 했다.      


재생산권 보장 면에서도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시대에 맞춰 진전을 이룬 내용이 있다. 낙태죄가 폐지되었는데도 유·사산 휴가의 허용 범위에 중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사산 휴가를 유·사산·중절 휴가로 바꾸고 모두 유급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임신, 출산, 난임 같은 경우에 당사자와 배우자를 위한 휴가 등의 조항이 보완되었지만, 앞으로 더 넓은 범위에서 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조치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폭력피해에 대한 조항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었다. 사실 공공기관을 비롯해서 많은 일터가 지금은 직장 내 성희롱 예방에 대한 규정을 갖추고 있지만, 가정폭력이나 스토킹은 가해자가 일터에 있지 않아서 고려사항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가정폭력, 스토킹 피해를 입은 사람이 직장에서 좀 더 안전함을 느끼며 일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법정에 나가거나 상담기관에 가는 시간을 지원하고 가해자가 직장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사용자의 의무로 만들었다.      


일터에서의 성평등을 위한 협상은 단번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쉽지 않고, 이미 있는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변화를 주는 방향으로 조금씩 진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특정한 가족형태를 가진 사람이나 돌볼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 그 명목의 휴가를 주거나 근무시간을 줄여주는 방식보다는 모두가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쪽이 더 바람직한 방향이다. 몇 사람이 출산이나 질병으로 휴직을 하게 되더라도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충분한 인원을 보충해 주면 되는데, 사람은 늘려주지 않으면서 해마다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 재촉하는 지금의 상황은 크게 바뀌어야 한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변화의 방향으로 여러 사업장에서 올해의 단체협약들, 내년의 단체협약들이 조금씩이라도 바뀌고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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