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무시하지 마라
단체교섭을 비롯하여 어떤 안건에 대해 협의할 때 사측이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문구가 있다.
“시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아서.”
특히 노조가 휴일, 휴가, 근무시간의 자율성, 복리후생의 수준을 높이자고 할 때 사측이 이런 반응을 하기 쉽다. 지자체 산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조건이 너무 좋으면 시민들이 반감을 갖는다는 뜻인데, 그럴싸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틀린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은 그저 많이 쉬고 적게 일하겠다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공공영역에서 일하고 결국 더 좋은 도시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자부심이고, 최선을 다해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우리 스스로도 희망하기 때문에,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도의 요구를 할 리가 없다. 우리의 제안은, 조금이라도 현재보다 더 나은 노동조건을 바라거나 지금의 장시간 노동을 좀 완화시켜 보자는 것이다.
세금을 내는 시민의 입장에서 공공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민이 비판하는 대상은 주로 공공기관의 노동이 아니라 ‘경영’이다. ‘방만한 경영’과 ‘노동자의 적절한 보상, 휴식’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시민과 노동자를 분리하지 마라
시민의 눈높이 변명이 자주 나오는 건 시민의 삶이 팍팍하다는 걸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살기 힘든데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편하게 산단 말인가”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짐작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그런데 시민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일하는 사람들의 애환이나 좋은 일터의 조건 같은 것을 시민이 과연 모를까?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노동조건의 향상을 주장하는 것인데 시민들이 싫어할까? 그럴 리가 없다. 시민의 다수는 노동자다.
나야말로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서울시민이다. 서울시민이자 서울시 산하기관의 노동자로 일했단 나는 ‘시민’과 ‘노동자’를 필요에 따라 분리하는 게 못마땅하다. 아주 의도적인 분리인 것이다. 오히려 공공기관이 선도적으로 좋은 제도들을 도입하면 민간 영역으로 확대되는 데 도움이 되고, 다 같이 노동환경의 수준이 올라갈 수 있다. 핑계나 이간질 대신 취해야 할 태도는 이런 것이다.
사측 위에 서울시
지자체 산하기관의 노동조합이 경험하는 가장 큰 특징은 지자체가 사용자(기관장)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각 기관의 운영은 자율적이라고 하지만 지자체가 관리·감독을 하고, 감사를 실시하며, 공무원도 아닌 직원의 복무에 공무원 복무규정을 준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관의 노사가 합의한 내용을 서울시가 바꾸라고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는 사측을 겨우겨우 설득하고 싸워서 합의에 도달한 사항들이 서울시에 의해 후퇴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자율적인 노사관계에 서울시가 이런 식으로 개입하면서, 시의 눈치를 보기 급급한 사측은 핑곗거리를 하나 더 갖게 된다. “우리가 합의해 줘도 어차피 시에서 반대할 일이라 소용없으니, 합의 못해주겠다.”라는.
사실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항시 경영평가와 총액임금제라는 제도를 이용해 공공기관의 노동조건을 통제한다. 경영평가에서 감점을 무기로 노사합의로 결정한 사항을 뒤집으라 종용하기도 하고, 총액임금제를 통해 임금협상의 범위를 ‘인상’이 아니라 ‘파이 나누기’로 좁혀버린다.
궁극적인 사용자가 시장이다 보니, 시장 선거를 앞두면 산하기관 노동조합들이 정책 질의를 하고, 때로는 후보자와 간담회를 마련하여, 후보들의 정책 검증도 하고 노동정책 제안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사용자를 선택하는 기회이자, 우리의 요구를 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시 산하 공공기관 운영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바라는 건, 시장이 바뀌더라도 기관의 기본적인 방향이 크게 바뀐다거나 노동조건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목적에 맞게 꾸준히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의 구성원으로서 느끼는 책임감과 더 나은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희망은 서루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공공기관 노동자의 요구를 그저 이기심으로 폄하할 때, 공공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