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돈이 없지 동지가 없냐
노조 창립 후 조직체계를 완성한 뒤 바로 준비에 들어간 일이 단체교섭이다. 노동자와 사용자 간에 협상을 통해 복무, 인사, 임금과 복리후생 등의 노동조건과 노동환경, 그리고 노조활동, 노사협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항을 정하는 것을 단체교섭이라고 한다. 그리고 단체교섭의 결과물로 작성된 것이 단체협약이다. 노조가 생기기 전에는 사용자 마음대로 정했던 것들이 이제는 우리가 함께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단체협약은 사업장 안에 있는 규정, 내규, 지침 등 많은 규율 중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지위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교섭의 절차는 준비단계, 진행 단계, 후속 작업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준비단계는 협약의 노동자 측 요구안을 마련하는 단계이다. 첫 단체협약을 만드는 초창기 노동조합은 모두 새로운 조항들을, 첫 단협이 아닌 경우는 기존 협약서 중 개정이 필요한 조항들을 추려 노동자 측 요구안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관련 법률과 상급단체 모범 단협안을 검토하고 조합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필수다. 조합원 의견 수렴 과정에서 다양한 요구와 이해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서로 설득하고 의논하면서 요구안을 만들어간다.
실제 교섭 단계는 노동자 측의 교섭 요구 -> 사용자 측의 공고와 수용(교섭창구 단일화) -> 교섭(본교섭과 실무교섭) -> (합의되지 않을 경우 조정 -> 조정되지 않을 경우 쟁의) -> 잠정합의안 도출 -> 잠정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 -> 과반수 찬성 시 협약서 체결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체결식을 하면 후련해지긴 하지만, 다 끝난 게 아니다. 후속 작업으로 단체협약을 반영해 회사의 기존 규정들을 개정하고, 필요한 부분을 전 직원에게 공지하며, 세부사항을 노사가 합의하기로 한 조항들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한다. 사용자가 이 후속 작업에 적극적인 경우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노조가 계속 따져 묻고 사측이 후속작업을 성실하게 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야 한다.
꼼꼼하게 준비하고 과감하게 교섭하기
단체협약을 향한 모든 과정은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탄탄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처음 단체교섭을 시작했을 때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교섭 방법(노동관계조정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을 공부하고 100개가 넘는 조항을 1번부터 새로 만드느라 고생했다. 가장 중요한 건 조합원 모두가 단체교섭의 방향을 공유하고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백지상태에서 조합원들이 각자 의견을 내는 것 무리니, 사전 작업, 그러니까 타 기관의 단협을 모아서 비교하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파악하기, 사내 규정과 서울시/중앙정부의 각종 방침을 살펴보기, 관련 법률 점검하기 같은 작업을 미리 집행부가 해놓고 요구안 초안을 작성했다. 이 초안을 가지고 모든 조합원들과 논의를 시작하는데, 결의대회 형식으로 모든 조합원이 교섭의 시작을 함께하고, 부서 또는 직급별로 소규모 간담회를 하면서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담회를 하거나 면담을 하다 보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한다. 기발하게 좋은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가끔은 실현가능성 없는 황당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럴 때는 안되면 안 되는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내용이 다듬어진다. 황당한 제안은 대개 공공기관의 운영에 대해 모르는 데서 나왔다. 예를 들어 연차휴가를 엄청나게 늘리자든가, 연봉 인상률을 무작정 높이자든가. 그런 경우에는 공공기관이 무슨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우리가 개선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자 전체가 함께하는 투쟁에 참가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조합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사실은 기관의 시스템이나 자신의 노동조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월급을 몇 년째 받아왔지만 연봉제인지 호봉제인지를 모르는 경우도 본 적이 있다. 교섭을 포함해 노조 활동을 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잘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될 수 있어 다행이다.
첫 번째 단체협약 이후 2년에 한 번씩 교섭을 했는데, 이미 있는 단협을 기본으로 조항을 고치는 것이니 첫 단협만큼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기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긴 시간 협상을 해야 했고, 많은 것을 바꾸었다. 2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어서, 그 사이에 정책환경도 변하고 조합원들의 요구도 새로 생긴다. 정말 어려운 시기에는 그냥 자동갱신을 하는 노조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래도 교섭과정 자체가 조합원들에게 일종의 교육이자 훈련 효과가 있다는 판단을 했기에 요구안을 새로 만들고 교섭을 진지하게 진행했다.
이상적인 단협안의 실현이란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견해를 달리하는 다수의 조합원 사이의 의견 조정이 되었더라도, 그 뒤에 사용자 측과의 협상과 투쟁을 통해 원래의 요구안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결과물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항상 사측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렇지만 노동법 강의를 들을 때 들었던 “합리적인 근거로 싸우는 게 아니라 조합원들의 의지로 싸우는 것이다”라는 조언처럼, 합리성보다 조합원들의 힘 크기에 따라 협상의 결과가 정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합리적인 근거가 없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건 오히려 기본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어쨌든 근거가 충분하고 논리적으로 결함이 없는데도 사용자 측은 그 요구에 동의하지 않는 일이 많다. 교섭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 어떤 노동조건의 향상도 사측이 먼저 제안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요구해야 얻을 수 있는 것, 여럿이 함께 덤벼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성평등 단협을 지향하다
세 번의 교섭을 통해서 꽤 많은 변화를 이루었다. 교섭은 힘들고, 결과도 처음 기대치에는 못 미쳐 어느 순간 합의를 결정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나중에 모아놓고 보면 늘 좋은 결과였던 것 같다. 임금 배분을 더 공평하게 하는 방향으로, 노동자 의견이 경영에 더 반영될 수 있도록 노조와 사측의 협의구조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건강과 안전을 더 보장하는 방향으로, 휴식을 더 늘리는 방향으로 진전해 왔다.
그리고 또 하나, 다양성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나아가는 방향이 우리에게는 정말 중요했다. 성평등한 내용의 단협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기관의 성격과 조합원 구성의 특성상, 우리는 “우리가 밀리면 다른 노조들도 다 밀린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교섭에 임했다.
몇 가지 진전은 이런 것이다.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휴가에서조차 법률혼 배우자만을 인정하는 부당함을 지적하고 ‘배우자’ 정의를 사실혼 관계, 그리고 생활동반자로 점점 확대했다. 유·사산 휴가를 유·사산·중절 휴가로 바꾸어 임신중지의 경우도 유급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뿐만 아니라 가정폭력, 스토킹 피해를 입은 직원이 직장에서 일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젠더폭력 피해자 지원의 범위를 확대했다. 한부모 가족의 시간빈곤을 이해하고, 이들의 아이 돌봄을 위해 추가로 유급휴가를 쓸 수 있게 했다. 성평등 가치를 노조가 잘 이해하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평등 단협을 위한 논의를 풍부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