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이 생기고 나니 크고 작은 싸움거리가 생겼다. 문제가 있어 개선을 요구했는데 사측이 받아들이지 않아 싸울 일과 사측이 먼저 도발해서 싸울 일이 여러 가지 있었다. 사실 그 모든 사안에 똑같이 목숨을 걸고 대응할 수는 없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노조가 패배의 경험을 쌓는 건 장기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나는 이 판단이 지금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급적 중요하면서도 가능성 있는 사안을 먼저 다루었고,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꼭 이겨야 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나서서 싸웠던 것 몇 가지만 꼽자면, 제일 먼저 ‘노조 사무실 쟁취’를 위한 투쟁이 떠오른다. 노조에게는 당연히 공간이 필요하다. 회의도 하고 일상 사무도 보고 조합원들이 찾아와 쉬기도 하고 면담도 하는 공간. 기관의 공간 사정이 좋지 않은 건 우리도 다 알고 있었고, 그나마 아주 조그만 방 하나가 남아있어서 그곳을 사용하기로 합의가 되려던 참에, 사측에서 조건을 내걸었다. 노조 사무실 출입문에 아무것도 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게 조건이었다. 출입문 사이즈에 붙일 수 있는 것이래 봤자 포스터 한 장 정도다. 그리고 공간을 내주면서 그런 터무니없는 조건을 붙이는 건 그냥 억지다. 당시 서울시 출연기관들은 적어도 드러내놓고 노동조합을 탄압하지는 않는 분위기였고, 노동조합이 생기자마자 사무실 하나쯤은 군소리 없이 내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 분위기와도 맞지 않게 억지를 쓰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고, 우리는 사무실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사측이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활동을 반대하는 것이라 보고 싸우기 시작했다.
사측은 사무실 출입문에 아무것도 부착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시민이 보기에 불편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교통이 편리하고 대관료가 낮아 이미 전국의 많은 노조들이 장소 대관을 하는 그 건물에서 이런 말은 그야말로 ‘이용자’를 적대시하는 태도를 드러낸 것이고, 노조 포스터 하나도 불편해한다고 ‘시민’을 옹졸한 존재로 깔아보는 것이었다. 당시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던 단체의 한 실무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 ‘불편할 거라고 하는 말이 (시민인) 나는 더 불편하다’고 했고, 우리는 그 문장을 대자보에 넣었다.
‘사측이 사무실을 제공하지 않아서 이렇게 복도에서 회의합니다’라는 문구를 기둥에 붙이고 2주 동안 매일 점심시간에 복도에서 집행부가 모여 회의를 가장한 시위를 했다. 조합원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삼삼오오 지지방문을 했다. 문짝에 아무것도 붙이지 말라는 사측의 억지를 비웃으며, 출입문 모형을 만들어 설치하고, 조합원들은 거기에 포스트잍으로 항의의 문구를 적어 붙였다. 그 후 우리는 사측(대표이사)을 단체협약 미이행으로 고소했다. 그리고 점심시간과 출근시간에 사람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에서 1인시위를 했다. 매 단계마다 어처구니없는 답변만 했던 사측은 결국 우리를 이기지 못하고 처음에 이야기했던 장소보다 더 좋은 방을 노조 사무실로 내주고 말았다.
6년간의 노조 활동 중 가장 지난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병가 합리화를 위한 투쟁이었던 것 같다. 노조가 생기고 나니 전에는 몰랐던 불합리한 규범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노조 창립 직전 즈음부터였던가, 암에 걸린 동료들이 거의 동시에 나왔고, 긴 치료와 회복 기간을 가져야 하는 이들도 생겼다. 그때까지 병가를 승인받기 위해서는 입원치료를 해야 하는 경우에 한했고, 3차 의료기관의 진단서를 제출해야 했으며, 인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너무 엄격한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어 규정 개정을 요구하려고 사내 모든 규정을 뒤졌지만, 세상에나! 병가 조건과 절차를 명시해 놓은 문서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러니까 구두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같은 지침을 가지고 직원들의 병가를 허용하네 마네 해왔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우리는 먼저 병가기준을 명문화하라고 사측에 요구했고, 사측 도 명문화에는 동의했다. 그런데 어떤 내용으로 명문화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측은 기존의 구두 지침에 있던 내용을 그대로 가져가길 원했다. 그때부터 1년 반 동안의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사측이 요구한 3차 의료기관 증빙의 문제는, 먼저 3차 의료기관이 서울에 열두 세 곳 정도밖에 없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다니던 병원에서 수술을 하자는 권유를 받았을 때 병가 신청을 위해서 급히 대학병원을 수소문하여 병원을 옮기는 사태도 생겼다. 사측은 “1차 의료기관(개인병원)에서는 진단서를 남발한다”는 말을 회의석상에서 서슴지 않았다. 의사도 믿지 않고 직원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준 셈이다. 인사위원회 개최도 어처구니없었다. 고작 3일의 병가 신청을 심의하기 위해 외부 위원을 포함한 인사위원회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대개 인사위원회 하면 떠오르는 것은 징계와 승진 심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직원들은 병가 신청을 지레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엄격한 병가 기준은 유사기관들과 서울시 공무원 규정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우리는 ‘아프면 쉬자’를 문구를 손피켓으로 만들어 조합원 모두 손에 들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몇 년 뒤에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유명해진 ‘아프면 쉴 권리’를 진작에 제기했던 셈이다. 사측은 계속해서 우리의 병가기준 합리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노사협의회가 열리는 장소 앞에서 사측 위원들이 입장할 때 피켓 시위를 하기도 했고, 위원장 1인시위를 서울시청 앞과 서울시의회 앞에서 진행했다. 누가 봐도 불합리한 사항임에도 멀쩡한 공공기관의 관리자들이 이렇게 몰아붙이는 건, 병가 남용을 지레 걱정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냥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기 싫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했다. 사측은 자주 그렇게 ‘노조의 요구에 절대 응하지 않겠다’는 불타는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우리는 전보다 기준을 낮추기로 합의를 이루어 냈다. (노사 간의 합의는 결코 양 쪽이 흔쾌히 하는 게 아니라, 노조가 이끌어 내는 것이다!) 연속 20일 이상만 인사위원회 심의, 2차 의료기관 증빙 인정으로 병가 기준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단체협약에서 1차 기관을 포함해 등록된 모든 의료기관 증빙을 인정하게 되었다. 긴 싸움이었다.
크고 오래 걸린 투쟁 외에도, 우리는 매일 싸웠다. 조직문화, 인사평가 등 매일매일 벌어지는 불합리한 일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노사협의회나 단체교섭에서 협상 의제로 가져가는 건 기본이고, 고소나 서울시 노동 관련 부서에 의뢰하기도 하고, 민원을 넣기도 하고, 서명운동을 하기도 하고...... 사안의 성격에 맞게 방법을 구사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승리의 경험을 계속 쌓아나갔고, 조금씩 우리 손으로 바꾼 직장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