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으로 기억하는 것들

22. 우리가 사랑으로 기억하는 것들

by 황 영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뒤로, 나는 며칠 동안 울리지 않는 화면을 숱하게 확인했다. 네가 먼저 연락해 주길 바랐다. 엘리베이터의 진동과 주차장의 마지막 눈빛이 몸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문자 메시지를 쓰고 지우는 일이 습관처럼 생겼다. 정류장 의자 끝에 앉았다. 전광판 숫자가 바뀔 때마다 내 마음도 찍, 하고 울렸다. ‘잘 지내지?’ 같은 문장은 화면이 켜지기도 전에 사라졌다. 지금은 아닐 거라, 아마 바쁠 거라, 스스로에게 핑계를 건네며 밤을 넘겼다. 그때 알았다. 기다림이 고백보다 어렵다는 것을.


어느 저녁, 오랫동안 꺼져 있던 휴대폰 화면에 불이 켜졌다.


“오빠, 그 책… 언제 줄 거야?”


문장은 짧고 밝았다. 망설임이 없다는 뜻일까. 한동안 화면만 바라보다가 보냈다.


“괜찮다면 이번 주말 어때?”


엘리베이터 안에서 삼키던 말들의 잔향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금세 정해졌다. 토요일 두 시, 사람들이 많지 않고 햇빛이 잘 드는 작은 북카페. '그게 좋겠다.'라고 쓰고, 마지막에 적었던 '고마워'는 조용히 지웠다. 인사는 마음으로 대신했다.


그 주는 유난히 길었다. 책 표지를 닦았고, 접힌 모서리를 반듯이 폈고, 속지에 이름과 날짜만 단정히 남겼다. 설명은 이미 본문에 충분했으므로, 다른 문장은 더하지 않았다.


토요일, 한 시간 먼저 집을 나섰다. 지하철 창에 비친 얼굴은 생각보다 차분했고, 손바닥의 땀은 생각보다 솔직했다. 가방 속 책의 모서리가 손등을 가볍게 찔렀다. ‘오늘은 건네기만 하자.’ 마음속 작은 합의가 여러 번 만들어지고 사라졌다. 지하철역까지 천천히 걸었다. 횡단보도 초록 사람이 깜빡이며 나를 재촉했지만, 서둘지 않았다. 열차가 들어올 때 유리벽이 먼저 떨렸다. 객차 창에 비친 얼굴이 바깥 풍경에 얇게 겹쳤다. 스무 살 후반의 나와 지금의 내가, 잠깐 같은 반사면 위에 섰다. 나는 둘 중 어느 쪽에도 손을 흔들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역 이름이 바뀔 때마다 안내음이 들렸다. '다음 역은…' 그 말이 오늘의 한 장면을 예고하는 듯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햇빛이 계단마다 다른 속도로 쏟아졌다. 마지막 계단 위엔 바람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빛은 방금 닦은 유리처럼 맑았다.


카페 문손잡이의 금속이 미지근했다. 유리문 너머, 커피잔이 접시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늦게 오는 것들은 대개 조용했고, 조용한 것들은 대개 정확했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밀었다. 맑은 종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카페 창가에 앉아, 곧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종소리가 다시 잔잔히 흔들렸다. 고개를 들자, 시간이 비껴간 듯한 네가 서 있었다. 깨끗하고 단정한 얼굴, 햇살을 닮은 미소. 세월은 너에게 아름다운 깊이를 더했을 뿐, 그 순수는 여전했다. 네가 나 없는 삶에서 평화를 찾았다는 것을, 나는 한눈에 알았다. 나의 부재가 네게 평화를 선물했다는 진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너는 나를 발견하고 천천히 걸어왔다. 마주 본 순간, 심장은 여전히 한 박자 빨라졌으나, 그것은 더 이상 격정의 파도가 아니라 잔잔한 호수의 물결 같았다. 너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내 앞에 앉았다. 말 한마디 없이 지나가는 짧은 침묵. 그 안에 스무 해의 세월과 끝없는 그리움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색함이 아닌, 모든 것을 지나온 뒤의 고요였다.


“오빠… 먼저 와 있었네?”


목소리는 여전히 맑았고, 아주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 차분함 속에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네 얼굴의 평온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응… 오는데 안 힘들었어?”


커피 표면에 잔빛이 얇게 떨렸다. 내 숨도 그만큼 느려졌다. 네가 그렇다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네 눈빛이 내 얼굴에 가만히 머물렀다.


"오빠는 덜 늙었네. 예전과 거의 똑같아."


나는 그 말에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너도 여전히 예뻐."


짧은 인사가 오간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많은 질문이 목구멍 끝에서 맴돌았지만, 이미 눈빛으로 답을 주고받은 듯, 더 이상의 말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너무 오래 겹치면 행여라도 눈물이 떨어질까 봐, 우리의 시선은 각자의 커피잔으로 자주 내려앉았다.


“요즘은… 초등학생 아들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없어. 벌써 2학년인데, 하루 종일 에너지가 넘쳐서…”


네 말투는 들뜨지도, 특별한 의미를 내비치지도 않은 채 평이하게 이어졌다. 남편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고 했다. 고개를 떨군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한동안 나도 쉽지 않은 인생이었어. 오빠도 그랬겠지만 … 오빠랑 헤어지고 한동안은."


너는 혼잣말처럼 덧붙이고는 다시 미소 지었다. 삶의 파도를 무사히 통과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다행히 지금은, 소소한 행복의 조각들이 네 삶을 채우고 있음을, 나는 그 표정에서 읽었다. 나의 불행과는 무관한, 너만의 충만이었다. 나는 불필요한 흔적 하나 남기지 않으려 조심하며, 말없이 그 표정을 살폈다. 가슴 어딘가를 조여 오던 것이 스르르 풀렸다. 나는 나직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래…… 정말 잘됐다. 넌 늘 따뜻하고 지혜로웠어. 분명 좋은 엄마, 좋은 아내일 거야.”


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찰나,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스쳐 갔다. 나는 말없이 미소로 답했다. 그 미소는 진심이었다. 너만의 단단한 성을 쌓아 올린 듯, 내일의 푸른 싹을 키우는 네 눈빛 속에서, 내 오랜 그림자가 한 뼘쯤 줄어드는 평화로운 안도가 찾아들었다.


그때, 너는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오빠… 오빤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가슴을 짓누르던 모든 무게를 한숨처럼 흘려보냈다.


“보고 싶었지… 미안해서 연락도 못했어…… 너 보고 싶을 때마다 … 글을 썼어.”


말을 더 고르고 싶었지만, 그날은 문장 대신 책이 말하도록 두기로 했다.


나는 표지를 보이도록 책을 내밀었다. 『스무 살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 너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표지에 닿은 네 손톱이 살짝 투명하게 빛났다. 가을 햇살이 한 글자씩, 제목 위를 천천히 건너갔다.


"집에 가서 천천히… 아끼면서 읽어볼게, 오빠. 고마워."


너는 책을 살짝 접어들고 목차를 훑었다. '뮤즈'라는 단어 위에서 손끝이 멈췄다. '어… 나, '뮤즈'였네.' 짧게 웃는 너의 눈매가 아주 조금 젖어들었다.


"'로미오와 줄리엣'할 때 생각난다. 연극 다 끝나고, 사람들 다 회식자리로 갔을 때, 오빠 무대 뒤에서 혼자 앉아 있던 거 기억나?"


나는 숨죽여 너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나 아직도 기억나. 오빠가 연극이 끝나고 무대 뒤에 혼자 앉아있던 모습은 뭐랄까...... 슬펐어. 슬펐는데... 내 눈에는 그런 오빠가 안쓰러우면서도 너무 사랑스러운 거야. 그걸 보면서 얼마나 심장이 뛰던지...... 그때, 이 남자가 내 남자였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었어."


'사랑의 가벼운 날개로 나는 이 벽을 뛰어넘었소...' 스무 살의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 대사를 진심으로 믿었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현실의 돌담은 날개가 아니라, 내 영혼을 부러뜨리는 무게추였다. 나는 그 벽을 넘지 못하고 너를 잃었다.


무대 뒤에 내가 혼자 앉아 있을 때, 그 먼발치에서 나를 몰래 훔쳐보던 네가 떠올랐다.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평생 내 뇌리에 각인된 장면이었다.


"오빠, '사랑하게 되면' 그 노래 알지? 나 힘들 때 가끔 들어. 들으면… 오빠 생각나."


그 말이 끝나자 너는 입술을 오므렸고, 눈에는 살짝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울컥하는 숨을 한 번 삼키며 말했다.


"나도…… 그 노래 들으면 너 생각나."


그 말이 탁자에 내려앉자, 컵받침 가장자리의 물이 둥글게 번졌다. 그 후로, 컵 안의 커피가 식어가는 시간만큼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의 애달픈 옛사랑을 드디어 마주한 듯했다. 너는 숨을 들이쉬었고, 나는 그 숨을 내쉬지 않으려 애썼다. 멀리서 종소리가 한번 울렸다. 나는 그 침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널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 단 한순간도."


너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커피잔으로 떨어져,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그 파문이 멎기를 기다렸다가, 필사적으로 다음 문장을 밀어 올렸다.


“…… 그래도, 네 행복이 먼저야.”


우리는 서로를 보지 않았다. 그래서 동시에 울었다. 휴지는 꺼내지 않았다. 서로의 울음을 가리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너는 오래도록,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의 모양이었다. 이제는 그 모양 그대로를 사랑하며, 기꺼이 내 안에 자리 내어 줄 수 있게 되었다. 네 밝은 미소를 보았을 때, 나 없는 자리에서 자란 너의 평화가 먼저 내게로 전해졌다. 그 순간, 스무 해 동안 닫혀 있던 문이 안쪽에서 천천히 열렸다.


아쉬움이 감돌았으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나서던 찰나, 네가 멈칫하며 내 옷깃에 붙은 실오라기 하나를 조용히 떼어냈다. 오래된 습관처럼, 무심한 듯 사소한 다정. 그 찰나의 온기 속에서 지난 시간의 잔향을 맡았다.


손 한 번 잡지 못한 채 등을 돌리려던 그때, 네가 가장 환한 미소로 속삭였다.


"오빠, 다음 책… 나오면 그땐 내가 먼저 서점에서 사서 읽을게…… 연락하지 않아도."


나는 가장 편안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을 네가 가는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이상한 가벼움이 온몸을 감쌌다. 스무 해 동안 내 어깨를 짓누르던, 미안함과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돌덩이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나도 모르게, 우리의 시간이 시작되었던 대학교 교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밤의 캠퍼스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스무 살의 우리처럼 웃고 떠드는 어린 연인들이 지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쓰라린 질투나 깊은 회한에 잠겼을 테지만, 이제 나는 그들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저 빛나는 시간들이 부디 상처로 끝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나는 연극 연습을 하던 낡은 강당 앞을 지나, 우리가 캔커피를 나눠 마셨던 도서관 휴게실 창가에 섰다. 그때처럼 창밖은 어두웠고, 복도는 고요했다. 그곳에서 나는 우리의 과거를 원망하는 대신, 그 시절 나를 빛나게 해 주었던 너의 존재에 대해 가만히 감사했다. 너는 나의 뮤즈였고, 나의 거울이었으며, 내가 가닿고 싶었던 가장 좋은 세계였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우리가 자주 앉았던 벤치로 향했다. 차가운 나무 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보았다. 그때 깨달았다. 너는 내 삶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너는 내 안에 ‘너의 모양’을 한 채 온전히 남아 있었다. 과거에 나는 그 빈자리가 너무 아파 다른 무언가로 억지로 채우려 했고, 그래서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 빈자리는 채워야 할 결핍이 아니라, 내가 평생 소중히 간직하고 보듬어야 할 ‘기억의 공간’이라는 것을. 그 공간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빈자리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마음속에서 스무 해 동안 지속되었던 길고 긴 전쟁이 끝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는 정말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도망치거나 외면하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쓸 시간이었다.


밤이 깊자 노트북을 켰다. 오랜 시간 심연을 채웠던 과거의 기록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새 문서를 열었다. 나의 지난 삶, '너'와의 이별과 재회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이제 더 보편적인 사랑의 언어로 모든 '우리'에게 편지를 쓸 준비가 되었다. 창밖으로 희미한 불빛이 반짝였다. 손끝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넓은 여백 안에서 비로소 숨이 놓였다. 새 종이 맨 위에 커서를 옮겼다. 첫 줄엔 제목만 적었다.


우리가 사랑으로 기억하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