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나는 너의 뮤즈가 아니다
그가 영화 일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유를 알고 싶어 그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자기 영화를 찍고 싶어 그만둔 거라고 했다. 남의 영화를 찍는 일이 더는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푸념하듯 말했다. 나는 그를 믿기로 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혹시라도 결국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내가 모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은 끊이질 않았다.
영어 학원에서 첫 월급을 받았다. 은행에 들러 전부 현금으로 인출했다. 문구점에서 흰 봉투 한 뭉치를 샀고, 봉투 한 장에 현금의 대부분을 정성스럽게 집어넣었다. 그의 고시원으로 찾아가, 다음 달 고시원 월세를 결제했다. 총무는 '그 사람, 전생에 나라를 구했네, 허허.' 라고 말하며 나가는 나에게 말했다.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아 문자를 남겼다. 그는 비디오방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근처에 갈 일이 있으니 그때 들르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계시는 병원으로 향했다.
아버님은 여전히 누워만 계셨고, 병실은 일정한 기계음으로 채워졌다. 어머님은 왜 또 왔냐며 미안해하시는 얼굴로 나를 맞아주셨다. 아버님의 다리를 주무르는 일은 이제 익숙해져서 썩 잘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나는 다리를 정성껏 주무르며, 아버님께 간절히 말했다. 제발, 그가 하는 일이 다 잘되게 해달라고. 그래서 우리 결혼할 때, 아버님도 꼭 일어나셔서 우리 결혼식을 축하해 달라고. 아버님은 아무 반응이 없으셨지만, 나는 아버님의 다리에 예전과는 다른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긍정의 대답이라고 확신했다. 어머님 몰래, 침대 끝에 봉투를 두고 왔다. 알면 절대로 받지 않으실 거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괜한 수고를 덜어 드리고자 함이었다.
그를 보러 가는 길, 나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가볍고 경쾌했다. 왠지 모를 미소도 입가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헌신이 사랑을 확신하게 만드는,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었다.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마냥 밖에서 기다릴 수만은 없어 그가 일하는 비디오방으로 갔다. 비디오방은 2층이었다. 계단을 오르려는데, 옆에 있는 초밥집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로 붐비는 것을 보니 맛은 보장된 듯했다. 그가 저녁을 먹지 못했을 것을 알기에, 곧바로 초밥집으로 향해 모둠초밥 2인분을 포장했다. 건대 앞은 늘 커플로 붐볐다. 테이블마다 다정한 모습들이 그날따라 눈에 들어와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포장한 초밥을 들고 들뜬 마음으로 비디오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는 보이지 않았고, 다른 커플 몇 쌍이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그때, 그가 한 방에서 휴지가 가득 찬 쓰레기통을 들고 나왔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는 짧은 놀람과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오지 말라니까, 라는 짧은 말을 하면서도 카운터 의자를 한번 털어 나를 그곳에 앉혔다. 그는 쉴 틈 없이 바빴다. 금요일 밤은 우리를 제외한 모든 커플을 위한 밤이었다. 나는 계속 그를 주시했다. 틈이 날 때마다 포장해 온 초밥을 꺼내 그의 입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초밥을 받아먹던 그의 눈에 눈물이 금세 차올랐다. 그 눈물을 보니 나도 참을 수 없어, 시선을 초밥으로 떨구었다.
전화가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잠시 정지된 표정을 보였다. 수화기 너머로 사장인 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내 귀까지 들어왔다. 여자친구를 왜 불렀냐고, 당장 꺼지라는 말이 선명하게 꽂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만 바라봤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사장님이 오늘은 너랑 즐거운 시간 보내라네. 오늘은 그만 일하래."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그의 손에 이끌려 비디오방을 나왔다. 그가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비디오방을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님 병문안까지만 하고, 오늘은 그를 만나지 말걸 그랬다. 오늘은 특히, 그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던 내 욕심이 이 화를 불렀다고, 나는 밤새 몸을 뒤척이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다음 날, 그에게 문자가 왔다. 우리가 좋아했던 장소, 강둑에서 산책하자는 내용이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이 올라왔다.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설마 하는 생각조차 부정 탈까 봐, 나는 애써 생각을 지우며 그를 만날 준비를 했다. 강둑에 먼저 나와 그를 기다렸다. 그날따라 세찬 바람이 강물을 이리저리 쓸어내고 있었다.
그는 내게 이별을 고했다. 가장 잔인한 말로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