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나는 너의 뮤즈가 아니다
그를 만나기 전, 내 인생은 믹스커피와 진한 담배 냄새가 섞인 역겨운 맛이었다. 아빠가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그 맛만을 아는 여자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학생회장이던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강한 전기가 온몸을 휘감는 듯 직감했다. 저것이 바로 내가 벗어나려 했던 그 ‘역겨운 맛’의 반대편에 있는, 내가 기어이 쟁취해야 할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그 맛을 지키기 위해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세상이 맛을 가지고 있다면, 내 스무 살 이전은 늘 쓴맛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미래는 없다는 마음으로 내 멋대로 살았다. 근처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아빠와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는 이른 새벽에 나가 밤늦게야 돌아왔다. 단란한 가정을 꿈꾸지도 않았지만, 가끔은 우리도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현실은 늘 그들의 등 뒤에서 나를 밀어냈다. 남들보다 덜 공부해도 성적은 그럭저럭 나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학원을 다닐 돈도, 동생 둘을 챙길 시간도 부족했다. 결국 공부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어느 순간 내 삶의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졌고, 그때부터 나는 남들이 말하는 ‘불량한 학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유치원 때부터 친구였던 효진이의 권유로 처음 담배를 피웠고, 술은 놀라울 만큼 잘 마셨다. 효진이는 내 주량을 부러워했고, 나는 그 부러움 속에서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학교에서는 1교시부터 책상에 엎드려 잤고, 하교 시간엔 누구보다 먼저 교문을 빠져나가 효진이와 동네 오빠들과 어울려 다녔다. 호프집, 카페, 당구장, 아는 오빠 자취방을 전전하며 그저 ‘오늘’을 버티는 데에만 충실했다. 그 무리 중 한 명이 내게 고백했다. 공단에서 일하는, 팔에 용문신이 있는 스물두 살의 오빠였다. 그 오빠의 거친 손과 검게 그을린 팔이 멋있어 보였다. 특히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그의 허리를 부여잡을 때면 세상이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것 같았다. 언덕배기에서 시내를 내려다볼 때, 오빠가 물었다.
“너는 왜 사냐?”
나는 피식 웃었다. 그 한심한 질문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몰라.”
내가 되묻자, 그는 '나는 키스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나를 끌어당겼다. 그게 내 인생의 첫 키스였다. 키스를 하기 위해 '왜 사냐'고 묻던 사람. 그 키스는 믹스커피와 진한 담배 냄새가 섞인, 세상에서 가장 싸구려인 맛이었다.
새벽이 다 되어 집에 들어오자, 평소 같으면 잠들어 있어야 할 엄마가 깨어 있었다. 엄마는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잔소리를 예상하고 무릎을 꿇었지만, 그날 엄마는 달랐다.
“몸을 소중히 다뤄.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그거뿐이야.”
그리고 덧붙였다.
“그 외는 터치하지 않을게.”
허무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던 엄마의 말. 그 허무한 말이 딸을 가진 엄마의 가장 절박한 사랑이었음을 나는 훗날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그 방탕한 삶이 끝내 무료해질 즈음이었다.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좁은 방 안에서 여자 둘, 남자 셋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을 때 문이 세게 열렸다. 아빠였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손으로 담배 연기를 가르며 말했다.
“가자, 내 딸.”
그 한마디에 방 안이 멈췄다. 나는 아빠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그날 우리는 삼겹살집에 갔다. 아빠는 소주 한 잔을 따라 내게 건넸다.
“대학 가라. 그때부턴 네 마음대로 해. 돈......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아빠가 알아서 할게, 돈은.”
아빠가 울었다. 평생 무뚝뚝했던 그 사람이 울어서 나도 울었다. 그날의 소주는 썼고, 삼겹살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밤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때 처음, 나는 아빠의 딸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삶이 갑자기 바뀌진 않았다. 하지만 서서히, 분명히 바뀌었다. 대학은 내게 인생의 목표도, 꿈을 이루는 수단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어떤 냄새로 살아갈 것인지를 바꾸는 일이었다. 아빠가 말한 그 한마디가, 나를 ‘역겨운 맛의 반대편’으로 이끌었다. 담배를 끊고, 효진이와 멀어졌다. 효진이는 '네가 뭐라도 될 것 같냐'며 나를 경멸했지만, 그 시선을 감당하는 것이 과거에 내는 첫 번째 '세금'이라 여겼다. 무의미한 것들로만 하루를 허비하던 내가 조금씩 한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그건 결심이 아니라 '투쟁'이었다.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자존심을 버리고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다가가 묻기 시작했다. 내가 무시하던 반장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혀를 깨무는 것보다 더한 모욕감을 줬지만, 그럼에도 나는 했다. 그때 느꼈다. 삶이 바뀌는 건 거대한 결심이 아니었다. 절박함은 수치심을 쉽게 이겼고, 그것은 조용히 반복되었다. 성적은 점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영문과에 합격했다. 아빠는 울지 않았지만, 눈가에 늘 옅은 미소가 떠나질 않아 보였다. 엄마는 아빠가 회사 동료들에게 내 이야기를 자랑하고 다닌다며 살짝 웃었다. 그 웃음에 처음으로 내 존재가 비치는 것 같았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용인의 어느 연수원에서 열렸다. 영문과 선배들이 다정하게 맞이해 주었다. 쇳가루와 담배냄새가 섞인 공단 냄새 대신 비싸고 고급진 이름 모를 향수 냄새가 가득한 그 공간에서 나는 '이 세계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강당에서 사회자 선배가 마이크를 잡았다.
“다음은 과 학생회장님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때 무대 위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가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새내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 한마디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질 때,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따뜻하고 묵직했다. 순간, 내 안에 오래 묵은 냄새 하나가 사라지는 듯했다. 스피커에서 번져 나온 그의 음성은 맑은 공기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사람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다른 공기' 그 자체라는 것을.
밤이 되어 모닥불이 피워졌다. 각자 자기소개를 하던 중 내 차례가 왔다. 긴장 탓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담배 때문에 이런 거 아닙니다… 끊었습니다. 진짜로요.”
모두가 웃었다. 나도 웃었지만, 웃음 뒤로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불길에 함께 춤추고 있었다. 모닥불 때문인지, 그 미소 어딘가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 미소가 내가 선택한 이 세계가 옳았다고 확인시켜 주는 첫 번째 '보상'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