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언제나 너의 흔적이
11-1 나는 너의 뮤즈가 아니다.
그가 다리 위에서 돌아선 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귀에서는 강물이 흐르는 소리 대신, 그가 뱉어낸 마지막 말만이 줄리엣의 칼날로 박혀 재생되었다. '난 널 못 믿겠어… 너, 남자친구 있던 때도 나랑 잤잖아.' 우리의 가장 순수했던 시작을,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되돌려준 그의 잔인함. 나는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이 만들어낸 깊은 상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며칠을 앓았다. 죽을 것 같아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침묵했다. 그의 침묵이 우리의 확정된 이별을 알리는 대답이라 생각했다. 그가 나를 기어이 밀어내는 이유가 그 자신 때문임을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그 짐작은 내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사랑은 때로 이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무너뜨렸다. 세상의 모든 노래가 내 이야기 같아서 라디오를 멀리 했다. 안치환의 목소리가 흘러나올까 봐, 쿨의 전주가 시작될까 봐 두려웠다. 내 세상의 모든 배경이 그로 채워져 있었음을, 나는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확연히 알았다.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깨 거울을 보았다.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눈 밑은 거무죽죽했고, 입술은 생기 없이 터 있었으며,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공허해 보였다. 그를 사랑했던 대가가 고작 이것이었나. 그의 뮤즈, 그의 여자친구, 그의 사랑. 그 모든 수식어를 떼어내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다. 거울 속의 낯선 여자가 나에게 속삭였다. '너는 누구니? 왜 울고 있어?' 그를 원망하는 눈물이 아니었다. 나를 이토록 하찮게 만들어 버린 내 스스로를 향한 미안함의 눈물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맺힌 눈물을 닦고 입술을 깨물며 결심했다. 내 인생은 주인공은 바로 나여야만 한다고.
나는 도망치는 대신, 우리의 모든 기억이 깃든 그곳에 남기로 했다.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가 좋아하던 니체와 쿤데라가 아니라, 오롯이 내가 사랑하는 영문학의 세계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도서관의 낡은 책 냄새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되찾아갔다. 한동안 피하듯이 지나쳤던 휴게실에 들어갔다. 그와 함께 캔커피를 마셨던 창가에 혼자 서서 노란색 가로등이 비친 캠퍼스를 내려다보았다. 추억은 여전히 아릿했지만, 더 이상 나를 잠식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 아픔마저 끌어안고 나아갈 힘을 얻었음을, 이곳에서 나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음을 조용히 확인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나는 모교의 영어 강사가 되었다. 처음 강단에 서던 날, 윤 교수님이 강의실 앞에서 인자한 웃음으로 옷 매무새를 고쳐주시며 응원해 주셨다. 학생들 사이에 혹시라도 그를 닮은 얼굴을 찾게 될까 두려웠지만, 이내 평온을 찾았다. 이곳은 더 이상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내가 나의 이름으로, 나의 열정과 노력으로, 나의 지식으로, 나의 세계를 쌓아 올린 나만의 성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같은 대학의 동료 교수였다. 그는 뜨겁거나 열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다정하고 안정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늦게까지 남아 강의 준비를 할 때면, 그는 말없이 따뜻한 캔커피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갔다. 내가 과거의 상처 때문에 망설일 때, 그는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내 옆을 지켜주었다. 그와의 사랑은 격정적인 파도가 아니라, 잔잔하고 따뜻한 온돌 같았다. 나는 그 온기에 기대어, 길고 길었던 내면의 겨울을 끝낼 용기를 얻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렀을 때, 나는 세상이 주는 또 다른 형태의 완전한 사랑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공원을 걸을 때, 남편과 나란히 앉아 주말 드라마를 보며 웃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삶의 빈자리가 다른 행복으로 온전히 채워졌음을 느꼈다.
물론, 아주 가끔은 그가 떠올랐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우연히 ‘사랑하게 되면’이 흘러나왔을 때가 그랬다. 예전 같았으면 가슴이 무너졌을 테지만, 이제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의 꿈을 향한 치열했던 눈빛, 서툴지만 진심이 가득했던 그의 사랑. 그 모든 것이 내 스무 살을 가장 빛나게 해 주었던 소중한 한 페이지였음을, 나는 이제 담담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그 기억은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 내 젊은 날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윤 교수님 어머님의 부고를 들었을 때, 나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혹시라도 그곳에서 그를 만나게 될까 봐. 스무 해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그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나는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이제 그의 뮤즈도, 그의 여자친구도 아닌, 온전한 ‘나’였으니까. 나는 조용히 검은 옷을 꺼내 입었다.
11-2 언제나 너의 흔적이
퇴원하던 날 내 몸은 바짝 말라 있었다. 의사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권했지만 나는 고개를 돌렸다. 고시원으로 돌아와 불을 껐다. 창문 없는 방, 완전한 칠흑의 어둠 속에서 나는 너를 생각했다. 나를 위해 기꺼이 지옥까지 동행하겠다던 눈빛, 내가 너에게 뱉어낸 비열한 말들. 너를 지키려 했다는 명분 뒤에 숨은 것은 결국 비겁하고 나약한 나의 두려움이었음을, 나는 그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인정했다.
시간은 잔인했고, 가끔은 사람을 성숙하게 했다. 스무 해의 강물이 많은 것을 쓸고 갔지만, 몇몇 기억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그 사이 아버지는 떠났고, 나는 끝내 사랑의 굴레를 제대로 지지 못했다. 책임의 무게가 벅차 몇 번의 가벼운 만남을 전전했다. '안정'이라는 막연한 말에 기대 결혼의 문턱을 넘었지만, 그 시도마저 실패로 끝났다. 이혼한 전 아내는 날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랑 살면서 늘 다른 여자가 당신 곁에 있는 듯 했어. 그 여자 곁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는 사람이야, 당신은."
반박하고도 싶었지만, 나는 말을 아끼며 그녀를 보냈다. 사랑과 이별, 행복과 슬픔의 모든 표면엔 늘 너의 흔적이 아릿한 향기처럼 묻어 있었다. 너에게서 시작된 공허는 그 누구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 반지하와 옥탑, 허름한 원룸을 떠돌았다. 낮엔 논술, 밤엔 영어를 가르치고 주말엔 카페에서 설거지를 했다. 손등은 늘 거칠었고 발뒤꿈치는 계절마다 갈라졌다. 밤 11시부터 새벽 2시. 그 시간을 '내 시간'이라 불렀다. 그때에만 숨이 고르게 쉬어졌다. 희미한 스탠드 불빛 아래, 문장 하나씩을 정성껏 말려가며 노트에 적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백지 앞에서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너의 이름을 쓰려고 펜을 들면, 다리 위에서 너를 뿌리치던 내 손의 감각이 되살아나 손 전체가 마비되는 듯했다. 첫 글자 '너'를 겨우 적었다가, 그 한 글자가 담고 있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미친 듯이 까맣게 덧칠해 지워버렸다. 종이가 찢어졌다. 너에 대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너를 더럽히는 일처럼 느껴졌다. 너는 내게 구원이었는데, 나는 너에게 파멸이었다. 감히 그런 내가 너를 기록할 자격이 있을까. 찢어진 노트 조각을 손에 쥐고,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울음 끝에 남는 것은 언제나 지독한 자기혐오였다.
아침이 오면 희미한 빛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 학원에서는 아이들의 공책에 빠진 조사 ‘을/를’을 고치며 내 삶에서 빠져나간 것들을 떠올렸다. 하루는 중학생 아이의 글을 첨삭하다가 오래 멈췄다.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주제의 글이었다. 아이는 서툰 문장으로 짝사랑하는 친구에 대해 썼다. ‘그 애를 보고 있으면, 나쁜 마음이 사라지고 세상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그 순수한 문장 앞에서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에게 너는 그런 존재였다. 너를 만나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너의 믿음 안에서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다. 나는 세상을 지킬 용기를 얻는 대신, 너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비겁함으로 너의 세상을 무너뜨렸다. 나는 아이의 공책에 동그라미를 쳐주었다. ‘아주 좋은 문장이구나.’ 그 칭찬은 사실, 내가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내 순수했던 마음에 건네는 뒤늦은 위로였다. 저녁이면 편의점 파라솔 아래서 삼각김밥을 먹었다. 주말 카페의 설거지통에는 컵이 끝없이 쌓였다. 거품이 산처럼 올랐다가 수채구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들을 굳이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남겨진 것들을 조금 더 단단히 붙잡으려 했다. 늦은 밤, 계단을 올라 원룸으로 돌아왔다. 거칠어진 발바닥 살이 수건의 섬유를 걸어 당겼다. 그 거친 마찰감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다시 글을 쓰고 싶었다. 세상을 향한 시나리오가 아닌 내 안에 너를 향한 글을. 열한 시. 노트를 펼쳤다. 첫 줄은 또 실패했다. 지우고 다시 쓰고, 결국 한 줄을 찢어냈다. '내가 이딴 글을 써서 뭐 해.' 비웃음이 차올랐다. 다시 술병을 찾을까 싶었지만, 내 안의 마지막 자존심이 그 파멸을 막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밤새 말라붙은 싱크대의 밥풀을 손톱 끝으로 긁어냈다. 딱딱하게 굳은 밥풀이 주는 선명한 통증, 현관 앞 택배 상자의 축축하고 차가운 감각, 창틀에 앉은 먼지를 쓸자 빛 속에서 흩어지는 미세한 입자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노트에 적었다. '딱딱한 밥풀. 축축한 상자. 흩어지는 먼지.' 온도는 숫자가 아니라, 사물의 미세한 상태로 기록된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때로 지난 시절의 비릿한 술 냄새, 혹은 지워지지 않던 피 냄새의 잔혹한 환영이 스치듯 떠올랐지만, 이제는 낡은 책 종이 냄새와 희미한 잉크 향이 그 자리를 차분하게 채웠다.
마침내 나는 쓸 수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바로 '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고통스러운 기록의 끝에 나의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이름은 『스무 살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글 속에서 ‘너’는 여전히 눈부셨고 ‘나’는 여전히 초라했다. 오랜 시간 글을 쓰는 동안 내 안의 그리움과 죄책감은 서서히 다른 온도로 변했다. 과거의 나는 너의 존재로 내 허기를 채우려 했다. 이제의 나는 너의 부재를 통해 비로소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적어도 내 노트 위에서만큼은 그렇게 믿을 수 있었다.
책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몇몇 독자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었다. '그 장면에서 오래 멈춰 읽었습니다.' 그런 문장들이 내가 걸어온 길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작은 안도로 남았다. 그 뒤로는 간간이 강연을 다니고 글쓰기를 나누며 조용하고 성실하게 삶을 이어갔다.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몇 해가 되었다.
시간은 여전히 잔인하게 흘렀지만, 가끔은 나를 다정하게 내버려 두었다. 복구는 결심이 아니라 반복이었고, 반복은 결국 온도를 바꿨다. 아니, 정확히는 온도가 바뀌었다고 나는 기록했다. 글쓰기는 어쩌면, 지워지지 않는 얼룩 위에 새로운 문장을 덧입혀 다른 무늬를 만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