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내 불행이 번지지 않게
우리는 다리를 두 번 건넜다. 돌아갈 때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듯이. 난간은 차가웠고 물 위로 헤드라이트가 길게 찢기며 흘러내렸다. 바람이 차갑게 물결의 결을 한 번 쓸고 지나갔다. 나는 기어코 널 잡아 세웠다. 차마 널 볼 수 없어 강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오늘 내가 여기서 해야 할 말들은 이미 어젯밤, 고시원의 차가운 방바닥에서 모두 발명되었다.
어제 나는 마지막 남은 일자리에서 잘렸다. 건대 앞 비디오방이었다. 알량한 감독 꿈을 놓지 못해 돈 걱정 없이 영화를 보려는 속셈이었지만, 그곳은 영화관이 아니라 연인들의 은신처였다. 그들이 떠나면 남겨진 흔적을 치우는 것이 내 일이었다. 주말 밤, 너는 날 보고 싶다며 그곳까지 왔다. 나는 겉으로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었다. 내 사랑을 앉혀 두고 남의 사랑의 흔적을 닦아내야 했다. 너는 내가 좋아하는 초밥을 포장해 와, 틈날 때마다 내 입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혹시라도 먹은 흔적이 남을까 휴지를 들고 내 입가를 살피던 너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너는 나보다 더 빨리 눈이 빨개졌다. 서로의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알아채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CCTV로 지켜보던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알바가 근무 중에 여자친구를 불러? 당장 둘이 꺼져!”
귀를 찢는 고성과 함께 해고 통보가 쏟아졌다. 나는 네 손을 붙잡고 서둘러 나왔다.
“사장이 일찍 퇴근하라네. 여자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라고.”
나는 또 거짓말을 했다. 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고시원으로 돌아와 소주를 땄다. 창문 없는 방의 어둠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꺼진 TV 화면에 비친 내 희미한 윤곽을 바라보았다. 술에 부어 낯설어진 얼굴, 꿈의 빛을 잃고 공허해진 눈동자. 저건 내가 아니었다. 적어도 네가 사랑했던 나는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네가 보였다. 영어 연극제 무대 뒤편에서, 수많은 소음 속에서도 오직 내 눈짓 하나에 집중하던 너의 맑은 눈. 낡은 자취방, 고장 난 보일러 앞에서 촛불을 켜고 ‘비밀아지트’라며 웃던 너의 따뜻한 얼굴. 내가 쓴 시나리오를 읽기도 전에, 흥분에 들뜬 나를 먼저 사랑스럽게 읽어주던 너의 다정한 손길. 그 기억들은 별처럼 반짝였고, 그 빛은 비수처럼 날아와 현재의 나를 찔렀다. 문득, 내 방 어디엔가 처박아 두었을 줄리엣의 단검이 떠올랐다. 한때 세상을 다 가진 듯 품었던 그 낭만적 증표는, 이제 내 초라한 현실을 비웃는 값싼 플라스틱 조각일 뿐이었다.
“어떻게…”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 초라하고 비굴한 TV 속의 유령이, 그토록 빛나던 너의 곁에 설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 더러워진 손으로 너의 깨끗한 뺨을 만질 수 있단 말인가. 너의 사랑은 나의 무능과 추락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었다. 너는 나를 비추며 여전히 사랑이라 말했지만, 나는 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분노조차 사치였다. 꺼진 TV 화면 속, 술에 부어 있는 낯선 유령. 나는 그 유령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혐오감이 올라왔다. 저렇게 초라한 존재가 감히 너의 곁에 설 수 있단 말인가. 너의 빛은 나의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시나리오 뭉치를 꺼냈다. 너를 닮아있던 이야기들. 나는 그것들을 한 장씩, 소리 없이 찢기 시작했다. 맥없이 결을 따라 찢어지는 종이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내 안의 무언가가 함께 찢겨 나가는 것 같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마지막 장을 찢어 쓰레기통에 넣은 후, 그 통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총무가 오늘은 청소 안 하냐며 나를 다그쳤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조용히 방에 들어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누군가가 깨우지 않는다면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도 괜찮을 밤이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뱉어낼 가장 잔인한 문장을 발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비수를 들고 네 앞에 서 있었다. 트럭이 다리를 지날 때 교각이 낮게 울렸다. 예전 같으면 그 울림에 우리가 발끝을 맞췄을 텐데, 오늘은 내 입이 한 박자 늦었다.
“요즘 우리가 자주 못 만나.”
목소리가 떨렸다. 연습했던 말과 달랐다.
“불안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몸 어딘가에서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의 너와 나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마치 남의 말처럼 낯설게 들렸다. 머릿속에선 ‘그만둬, 제발 그만둬’ 하는 외침이 울렸지만, 멈추면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을 것 같았다. 너의 '왜 그래'하는 질문은 흘려보내고 내 말만 끊임없이 이어갔다.
“너 좋아하는 남자들 많잖아. 몰래 만나면 어쩌나, 나는 늘 불안해.”
너는 내 입에서 이별의 말이 새어 나오지 않게, 엉뚱한 말을 앞세웠다.
“오빠가 왜 이러는지 알겠어, 알겠는데…… 제발 하지 마 오빠. 나는 오빠를…… 예전보다 지금, 더 사랑해.”
너는 함께 풀자며, 그런 말 하지 말라며 울며 매달렸다. 나는 단호하게 정리하자고 말했다. 네가 와락 안겨왔고 나는 매정하게 팔을 뿌리치자 너는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 나 다 안다니까. 오빠는 날 사랑하잖아. 맞잖아…… 지금 이러는 거… 돈이 없어서, 가난해서가 아니잖아. 그냥 오빠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영화도, 우리 사랑도…… 아니야?"
그 순간 모든 세상의 소리가 멀어졌다. 시선은 저절로 강 건너편 아파트의 환한 창문으로 향했다. 저 불빛 아래에서는 누군가 따듯한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사랑을 나누고 있겠지.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평범하고 단단한 저녁. 그 불빛이 칼날처럼 나의 눈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 불빛을 등진 채 너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말해 버렸다.
“난 널 못 믿겠어… 너, 남자친구 있던 때도 나랑 잤잖아.”
네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눈꺼풀이 두 번 힘없이 떨렸다. 입술이 바싹 말라붙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요 속에서 네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그게 네 마지막 대답처럼 보였다.
돌아서는 길, 신호등의 잔불이 비에 젖은 길바닥에 얕게 번져 있었다. 길은 가벼웠고, 나는 한없이 무거웠다.
연락을 끊었다. 너는 지쳐갔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어느 밤 소주를 마시고 고시원 화장실에서 기절했다. 눈을 뜨니 병원의 흰 천장이었다. 급성 간염. 총무가 내 전화기로 너에게 연락하려는 순간, 나는 절규하듯 소리쳤다.
“하지 마!”
그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날 쏟아진 울음은 베개가 흠뻑 젖도록 멈추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이별은 내가 널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더 미워해야만 완성될 수 있다고. 내가 더러워지는 만큼 너는 깨끗하게 보존될 것이라고.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려 했던, 나의 가장 비겁한 오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