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be or Not to be

: 13. 나는 너의 뮤즈가 아니다

by 황 영


3월의 대학은 생각보다 쌀쌀했다. 내 인생의 봄이 온 것처럼 옷도 봄처녀처럼 하늘하늘하게 입었건만, 캠퍼스의 차가운 온도와 매서운 바람은 내 낭만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오티 때 친해진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그들과 있을 땐 나도 잠시 평범한 스무 살이 된 듯했지만, 웃음소리가 잦아들면 언제나 나만의 공기가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다른 신입생들처럼 선배를 보면 인사를 잘하고, 점심시간이면 '점심 드셨어요, 선배님? 점심 사주세요!' 하며 온갖 애교를 다 떨었다. 차마 그것까지는 같이 할 수 없어서 나는 빵 하나, 커피 하나 들고 빈 강의실에 앉아 창밖의 캠퍼스를 바라보며 먹는 편이 편했다.


학생회장 선배가 눈에 들어온 날에는 마음이 꽉 찬 듯 행복감이 몰려왔고, 그를 보지 못한 날에는 우울해져 고개를 푹 숙인 채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학생회실에 들어갈 명분도, 그 근처를 서성일 용기도 없었다. 다른 여학생 무리들이 이미 그 자리를 점령하고 있었고, 내 마음이 들킬까 봐, 혹은 그 무리에 섞이는 내가 싫어서 그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남자친구는 자기가 원할 때만 밤늦게 오토바이를 타고 날 태우러 왔다. 그의 등 뒤에 매달려 밤거리를 달리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언덕 위에 올라 키스를 했다. 키스하기 전 나는 꼭 담배 한 대를 다 피웠다. 그의 입에서 나는 담배 냄새가 싫어서였고, 담배를 피우지 않은 내 입을 그에게 허락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역겨운 맛'의 세계에서 나만 깨끗한 척하는 것이 위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파스타를 먹고, 영화를 보고, 술을 나누는 반복된 만남 속에서 나는 그를 점점 낯설게 느꼈다. 그가 나와의 관계를 원할 때마다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핑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을 내세우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엄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과거의 냄새가 다시 내 몸에 배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오토바이를 탈 때도 키스를 할 때도, 내 머릿속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서히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누구인지 점점 그에게 설명할 수 없게 됐다.


"대학 가더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그의 웃음소리에는 늘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실실 웃으며 내게 던졌던 그의 질문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의 의심은 잦아졌고, 그만큼 이유를 알 수 없는 화도 늘었다. 그럴 때마다 그를 달래던 나도 서서히 지쳐갔다. 하지만 헤어지자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건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내가 도망쳐 온 세계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 족쇄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내가 사는 동네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효진이도, 남자친구도, 그 세계의 모든 냄새가 싫었다. 그들은 내가 변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변했고, 그것은 자신들 스스로가 만든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점점 낡아갔고, 나 자신도 그 낡음 속에 묶여 있었다.


몰입할 것이 필요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다른 것으로 채워줄 뭔가가 절실했다. 학생회실 앞에 붙은 공고문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회 일을 하면 근처 편의점 아르바이트만큼의 장학금이 나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학생회를 하지 않을 이유가 나에게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드디어 그와 함께할 명분을 얻는 일이었다. 어느 날, 낡은 학생회실 문을 밀치고 들어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외쳤다.


“학생회 임원이 되고 싶습니다. 뽑아 주십시오.”


정식 면접 절차도 있지만, 학생회장 선배는 그 한마디로 충분하다며 나를 흔쾌히 임원으로 받아주었다. 다른 학생회 선배들이 나를 '용감한 특채'라고 부르며 놀렸지만, 싫지는 않았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그 틈으로 복잡한 생각이 밀려올 것 같아서 없는 일도 찾아서 했고, 천천히 해도 될 일마저 빠르게 처리해 버렸다. 우리 동네와는 달리, 이곳은 나를 ‘인정’ 해 주는 곳이었다. 물론 덤벙대느라 실수도 잦았지만, 선배들은 그런 나를 예쁘게 봐주고 모르는 것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르다 보니 나는 어느새 그들에게 ‘소속감’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때쯤 난 담배를 학교에서는 피우지 않게 되었다.


시험도 잘 보고 싶었다. 일을 잘한다고 칭찬받으니 ‘일만 잘한다’는 평가를 받기 싫었다. 곧 있을 과 최대 행사, 영어 연극제를 앞두고 있었지만 공부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에 가는 날을 줄이고,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한 뒤 학생회실 소파에서 몰래 잠을 청했다.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웠다. 세상이 처음으로 나를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그날도 도서관이었다. 연극제 업무와 중간고사가 겹쳐, 두꺼운 셰익스피어 원서 위에서 거의 기절하듯 졸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책상 위를 가볍게 노크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학생회장 선배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심장이 쿵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낮게 말했다.


"이거 다 마실 때까지만 쉬었다가 해."


도서관 휴게실에서 그와 나는 셰익스피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말은 어렵기도 했고,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표정, 그의 향기, 그의 호흡만이 생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다가 삼키며 창 밖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 열심히 바쁘게 산다고만 해결되는 건 아닌 것 같아. 인생은 뭐랄까... 깊이 있게 사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살면서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해준 사람이 없었다. 삶의 깊이를 한 번도 헤아리며 살아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 말이 마치 평생 잊지 못할 모토처럼 가슴속에 들어와 깊게 박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그 캔만 바라보았다. 뜨거웠다. 내 노력은 언제나 '과거'를 지우기 위한 발버둥일 뿐이었는데, 그가, 이 새로운 세계의 중심인 그가, 나의 '현재'를 알아봐 주었다. 그 캔커피는 단순한 온기가 아니라, 내가 이 세계에 속해도 좋다는 '허락'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학생회실에서 영어 연극제 작품을 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학생회장 선배는 이번에도 총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조감독인 운용 선배가 귀띔했다.


“복학 후에 선배가 감독한 ‘리어왕’은 교수님들한테 역대급 칭찬받았대. 심지어 연극 관계자가 스카우트 제의도 했다더라.”


그는 이미 대단한 사람이었다. 캔커피의 온기가 떠올라 알 수 없는 경외감에 그와의 거리를 느꼈다. 회의가 시작됐다. 그는 ‘햄릿’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미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본까지 써놓았다며 배우들과 스텝들에게 나눠주었다. 배우들은 대본을 훑어보며 서로 마주 본 뒤 '못하겠다'는 푸념을 터뜨렸다. 그는 '우린 할 수 있다'며 독려했지만 대본을 넘길수록 배우들의 얼굴빛은 어두워졌다. 운용 선배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고집했다. 윤 교수님이 직접 대본을 봐주셨고, 이번엔 그 작품을 더 선호하신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윤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었다고 하셨다.)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회의는 중단됐다. 그는 회의실에 남고, 배우들과 스텝들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나에게도 한 개비 건넸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배우들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대사가 어렵고, 외워야 할 대사의 양도 많아서 감정 몰입이 쉽지 않아 연기를 하기가 어려울 거라 했다. 우리가 프로배우냐며, 울듯이 담배 연기를 뿜었다. 한 선배가 '햄릿'을 한다면 이번 연극에서는 빠지겠다는 말까지 했을 때, 여러 명이 그에게 '나도 그러겠다'며 동의했다. 학생회장 선배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오버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 한낱 1학년 신입생이자, 학생회 임원 막내인 나도 위기감이 느껴져 심장이 콩닥거렸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이번에 '햄릿'을 했다가는 뭔가 큰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이 '새로운 세계'가 깨져버릴까 봐 불안감이 엄습했다.


회의가 재개되기 직전, 그가 조용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그 순간, 공기가 멈췄다. 그 말은 단순한 독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서관의 그 따뜻한 캔커피를 건넨 사람의 고독한 질문이었다. 나는 우리 과와, 우리 연극의 생사가 걸린 갈림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햄릿’이라는 글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다행히도, 우리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그는 말끝을 멈추고, 내 눈빛에 담긴 말을 읽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내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햄릿’… 이 좀… 주제가 무겁긴 해… 그치? 다른 걸로 할까, 이번에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췄다. 그와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한 문장을 완성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웃었다. 우리 과는 그렇게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모두가 ‘햄릿’ 대본을 치우고 ‘로미오와 줄리엣’ 대본을 꺼내는 그 순간,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나는 그게 좋아서 그에게 물들고 싶었다. '햄릿'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간절한 내 시선 때문에 그의 결정이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회의 중 돌아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이미 감지했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자신의 결정을 물리는 그 결정적인 순간,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그 마법 같은 순간, 경외감으로 인해 멀어진 거리감이 단숨에 좁혀지는 것을 느꼈다.


캔커피는 '허락'이었고, 이것은 '응답'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매일 조금씩 그의 색으로 기꺼이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