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라보는 너를 바라보다

: 14. 나는 너의 뮤즈가 아니다

by 황 영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고, 연극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온통 세상은 가을로 물들어 갔지만, 우리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챌 틈도 없이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총감독으로 연극제를 준비하는 그는 내가 이전에 알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예민해질 법한 시기에도 그는 오히려 더 침착했고, 배우 한 명 한 명의 대사 톤, 억양, 동선까지 꼼꼼하게 살피며 챙겼다. 마치 오래전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을 준비했던 사람처럼, '햄릿'은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그 자신은 로미오이자 줄리엣이었고, 조명감독이자 분장담당, 소품담당이었다. 내게 '삶의 깊이'를 이야기했던 그의 모든 말이, 연극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발현되는 순간,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그에게서 느꼈던 경외감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그가 운용 선배를 앞에 두고 화를 삭이며 말했다.


"이건 줄리엣의 단검이 아니야. 일을 이렇게 대충대충 할 거야?...... 다른 칼 구해와, 빨리."


큰 소리로 말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위압적이었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운용 선배는 그깟 칼 하나 때문에 난리라며 내게 하소연했지만, 그새 옷을 갖춰 입고 줄리엣의 단검을 구하러 나섰다. 왠지 그런 운용 선배가 못마땅하게 느껴져, 나는 선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운용 선배와 함께 줄리엣의 단검을 찾는 여정에 동행했다.


운용 선배는 근처 상가에서 번쩍이는 플라스틱 칼을 집어 들며 '이 정도면 됐지!'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줄리엣의 단검'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생각했다. 연극의 '깊이'를 상징하는, 영혼이 담긴 어떤 것이리라 어렴풋이 짐작했고, 그 짐작에는 알 수 없는 확신이 깃들었다. 나는 운용 선배가 투덜대는 것을 무시하고 상가 깊숙한 곳, 낡고 먼지 쌓인 진열대 속을 뒤졌다. 내 눈은 그가 원하는 '그 칼'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남대문 시장 청계천 상가를 돌고 돌아, 한 골동품 가게에서 썩 괜찮아 보이는 플라스틱 소재의 엔틱한 단검을 찾아내었다. 다행히 이 칼이 어느 유명한 연극단에서 실제로 쓰였던 소품이라는 것을 주인아저씨에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운용 선배는 적당한 칼을 찾아 다행이라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운용 선배가 여자 친구와 요즘 사이가 틀어져 심란하다는 말을 꺼냈다. 나는 성심성의껏 고민을 들어주었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조언할 수 있는 몇 가지도 그에게 전했다. 운용 선배는 그런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미소 지었다. 누군가에게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흡족한 마음이 올라왔다. 가는 길에 지하철 창밖의 가을 하늘은 물로 씻어놓은 듯 깨끗하게 하얗고 파랬다.


운용 선배가 새로 구한 줄리엣의 단검을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한참 단검을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오케이. 바로 이거지! 수고했다. 운용아!' 라며 만족해했다. 운용 선배가 나 덕분에 이 칼을 찾게 된 것이라고 딱 한마디만 더 해주길 바랐지만, 운용 선배의 처음 보는 환한 미소에 내 서운함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연극 연습을 하는 내내, 줄리엣의 단검을 마치 분신처럼 들고 다녔다. 군대 지휘관의 지휘봉처럼 단검을 휘둘렀고, 그 모습이 우습기는커녕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가 그 칼을 지니고 있는 것이 마치 그와 내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일모레가 총 리허설 날인데, 무대배경팀의 작업이 아직도 많이 남은 상태였다. 다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었지만, 대부분이 술을 너무 좋아하는 게 탈이었다.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에게조차 '내일 밤새고 하면 되니까 같이 술이나 먹으러 가자'는 한심한 제안을 했다. 나는 남은 그림작업을 두고 떠나는 그들을 보며, 강렬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때마침 낮에 주문했던 '오늘까지 끝내 놓으라'는 그의 지시가 벼락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림을 썩 잘 그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밑그림이 있어 물감과 페인트로 색을 입히는 정도는 자신 있었다. 막상 붓을 들고 해 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나름 재미까지 있었다. 내 손길이 닿은 이 그림 앞에서 배우들이 연기하고, 관객들도 좋아할 생각을 하니 더욱더 큰 힘이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그리다 문득 창가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총감독,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옹, 키스도 아닌데 그의 시선만으로 이렇게 심장이 떨릴 수가 있는 걸까. 서서히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몰라 잡고 있던 붓을 바닥에 떨구었다. 그는 그림을 봤고, 나는 그를 봤다. 그의 눈빛에서 '네가 해냈구나'라는 무언의 말이 읽혔다. 나를 알아봐 주었다는 강렬한 동지 의식이 밀려왔다. 그가 내게 건넨 '허락'과 내가 내린 '응답'이 마침내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빨개진 얼굴을 보았다. 이번에는 그를 닮아도 괜찮다고, 나 스스로를 다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