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나는 너의 뮤즈가 아니다
막이 올랐다. 객석의 모든 빛이 사라지고, 무대 위에 조명이 쏟아지는 순간, 나는 내 온몸의 피가 조명 빛깔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배우들의 목소리, 그들의 동선, 관객들의 숨죽인 시선. 이 모든 것이 그가 설계한 세계 안에서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세계의 가장 중요한 톱니바퀴 중 하나였다. 이 완벽한 몰입의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타오를수록 객석의 온도도 함께 올라갔다. 바로 그때였다. 로미오 역의 배우가 다음 대사를 잊었다. 찰나의 침묵이었지만, 무대 뒤의 우리에겐 영원처럼 길게 늘어졌다. 배우의 입술이 허공에서 멈춰 섰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운용 선배에게 대사가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무대 앞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운용 선배가 있어야 할 자리를 훑었다. 없었다. 자리가 비어 있었다. 온 신경이 곤두서 날카로운 통증이 짧고 강렬하게 몰려왔다. 공연 시작 직전부터 그의 여자친구에게서 미친 듯이 울리던 문자 수신음과, 초조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끊던 운용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다른 세계'가 기어이 '우리의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참이었다.
총감독, 그가 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뛰쳐나가려던 것과 거의 동시였다. 아니 내가 더 빨랐다. 나는 몸을 낮춰 무대 밑으로 포복하듯 기어 들어갔다.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는 것도, 바닥의 먼지가 얼굴에 묻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기어가는 동안 맨 앞에 앉아 계셨던 윤교수님과 눈빛이 잠깐 마주쳤지만 인사할 정도의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마침내 내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펼쳐 딱 맞는 부분을 찾아 로미오 배우를 향해 펼쳤다. 배우의 눈이 흔들리다 이내 초점을 찾았고, 그는 기적처럼 다음 대사를 이어갔다. 객석은 그 찰나의 멈춤을 연기의 일부로 받아들인 듯 고요했다.
나는 스케치북을 든 채로, 무대 반대편 어둠 속에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큰 강당에서, 그와 나, 단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아주 살짝, 거의 티 나지 않게 끄덕였다. 그 짧은 끄덕임. 그것은 단순한 고마움이나 뿌듯함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 세계를, 함께 지켜냈다.' 우리는 비로소 같은 호흡에 들어선 '동지'였다.
연극은 기적처럼 성공적으로 끝났다. 축하와 환호, 사진 세례로 어수선한 무대 앞. 그때 나는 그가 홀로 무대 뒤편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다들 뒤풀이 자리로 떠나는 걸 확인하고, 나는 아무도 몰래 무대 뒤편의 그를 찾으러 향했다. 혼자 앉아 있는 그의 등이 보였다. 모든 것을 쏟아낸 사람 특유의 후련함과,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으로 젖어 있는 등이었다. 한동안 그를 지켜봤다. 그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뒤풀이 자리는 광란에 가까웠다. 술과 환호, 그리고 눈물이 뒤섞였다. 윤교수님은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축하와 칭찬을 해주셨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내 귀에 가까이 대고 말씀하셨다.
"아까 정말 멋졌다. 활약이 대단하던데."
윤교수님과 함께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윤교수님은 그를 바라보더니 날 보고 조용히 속삭이셨다.
"둘이 너무 잘 어울려. 너네... 너무 예뻐. 잘해봐."
아니라고 부인해야 하는데 차마 그렇게 하기 싫어서, 나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숙여 발 그래진 얼굴을 숨겼다. 그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도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술기운이 오르자 딱 한 번만 용기를 내기로 했다. 술잔을 든 채, 그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그가 나를 알아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서로의 잔을 채우며 몇 마디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가, 짙어진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나 좋아해?"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시 한번 멎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왼손으로 세게 부여잡았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가는지도 모른 채, 간신히 대답했다.
"...... 네."
그가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체념하듯 말했다.
"나 여자 친구 있어."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역겨운 맛'의 세계에 묶여 있는 내 족쇄가 떠올랐다. 울고 싶었지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와 대등해져야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나도 모르게 그에게 맞받아쳤다.
"...... 저도 남자 친구가 있어요."
그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깊은 죄를 확인한 공범처럼,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각자의 생각 속에서, 말없이 술만 마셨다.
그날 밤, 남자 친구가 집 앞으로 찾아온다고 했다. 연극 준비로 바쁘다는 내내, 그는 내 연락을 닦달했었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집 앞에서 그를 만나기 싫어 근처 공원에서 보자고 그에게 전했다. 오토바이 소리가 가까워졌고, 그가 도착했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내게 헬멧을 건넸다. 나는 처음으로 그 헬멧을 받지 않으며 말했다. 오늘은 타지 않을 거라고. 헬멧을 벗으니 그의 비야냥거리는 얼굴이 보였다.
"연극? 대학 가니까 아주 딴 사람이 되셨나 봐. 집에도 안 들어오고. 혹시...... 딴 새끼랑 잔 거 아냐?"
"말 조심해."
"말조심? 하..."
그가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그의 입에서, 내가 그토록 지겨워하던 믹스커피와 담배 냄새가 몰려왔다.
"그런 거 맞네. 키스도 했겠네. 나 같은 놈한테 주기에는 아까웠겠지. 대학생 새끼랑 하니까 좋디? 아주 좋아 죽겠지? 어?"
선을 넘는 말을 하는 그가 놀랍지는 않았지만, 막상 그 저급한 민낯을 마주하게 되니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나의 웃음을 잘못 이해한 듯, 실실 웃더니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역겨운 맛'의 그 담배. 그리고 키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 담배 안 피워. 끊었어."
그의 표정이 굳어가는 걸 확인하고, 그 모습도 보기 싫어 나는 곧장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야! 이리 안 와?"
그의 고함이 등 뒤에 박혔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골목 하나를 돌자, 어둠 속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효진이었다.
"...... 다 들었다."
효진이는 담배를 피우며 쭈그려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너...... 처음엔 진짜 미웠거든? 잘난 척하는 것 같아서. 근데...... 지금은 아니야."
효진이는 한숨을 뱉 듯 담배연기를 어두운 하늘 쪽으로 길게 뿜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효진이의 말을 더 들어보려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제발 그 오토바이 새끼랑 헤어져. 그리고...... 우리도 이제 그만 만나자. 그게 너한테 맞는 것 같아."
효진이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를 이 세계로 끌어들였던 효진이었다.
"아니다. 우리 가끔...... 1년에 한 번 정도만 만나자. 그래도 여전히 우린 친구인 거 맞지?"
눈물이 쏟아졌다. 나를 묶고 있던 가장 무거운 족쇄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이별'이 아니라 '면죄부'였다. 나는 효진이를 끌어안았다. 고맙다고 말하려 했지만, 왠지 그 말이 선뜻 입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효진이는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따듯하게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담배 진짜 끊은 거야?"
"응"
"독한 년."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족쇄'는 풀렸지만, 여전히 그와 헤어지는 일은 괴롭고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