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나는 너의 뮤즈가 아니다
방 안의 공기는 탁하고 차가웠다. 책상 위에는 타이레놀 몇 통이 굴러다녔고 음식을 먹은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새우처럼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그 앙상한 등이 가여워서,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를 구해야 했다.
가장 먼저 집에서 가져온 죽을 냄비에 옮겨 부르스타 위에 올렸다. 불을 켜고 나니, 싱크대에 그릇 몇 개가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릇을 닦다가 구석의 빨래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옷가지들이 눅눅하게 쌓여 있었다. 그의 속옷도 섞여 있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빨랫감을 한 움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의 가장 사적인 때를 내 손으로 씻어낸다는 사실에 얼굴이 달아오르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빨래를 비비는 손이 오히려 신이 났다. 급한 대로 몇 개만 우선 헹궈놓고 죽을 살폈다. 따뜻하게 잘 데워졌다.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을 꺼냈고, 과일도 씻어 상을 차렸다.
나는 침대로 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힘없이 내 품에 안겨 일어설 때,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터질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열이 올라 붉었다. 정말 많이 아픈 것 같아 눈물이 또 울컥 솟았다. 죽을 한 숟갈 떠서, 내가 먼저 온도를 확인했다. 다행히 뜨겁지 않았다. 내가 다 먹여줄까 하다가, 남은 빨래가 마음에 걸려 그에게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먹어 오빠. 다 먹어야 해."
내 입에서 엄마랑 똑같은 말투가 나와 신기했다. 그가 죽을 먹는 모습을 잠깐 옆에서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잘 먹어서 뿌듯했다. 나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남은 빨래를 마저 했다. 빨래를 하는 와중에 힐끗힐끗 고개만 내밀어 그를 살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묵묵히 죽을 먹고 있었다. 진심으로 행복했다.
빨래를 화장실 천장에 매달린 건조대에 다 널고 나오니 그도 그릇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나는 그릇을 받아 들고, 남은 죽을 싹싹 긁어 마지막 한 숟갈을 떠서 그의 입에 직접 넣어주었다. '내가 장 봐서, 직접 만든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를 다시 눕히고 잠시 창가에 섰다. 창밖으로 마지막 노랗고 빨간 나뭇잎을 애처롭게 부여잡고 있는 나뭇가지와 그 너머로 시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이 보였다. 이런 사랑스러운 풍경, 그리고 여기, 바로 저기 내 사랑. 그냥 이대로 여기서 그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잠든 그를 바라보다,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쓰던 시나리오 뭉치가 보였다. 홀린 듯 다가가 의자에 앉아 첫 장을 조용히 넘겼다. 주인공의 이름. 그건 내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 옆에, 흐릿하지만 선명한 두 단어가 정성스러운 손글씨로 쓰여 있었다.
'나의 뮤즈.'
심장이 또다시 쿵, 하고 떨어졌다. 새로운 피가 솟구쳐 온몸을 휘감으며 빠르게 돌았다. 나에게 그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는 나를 '그의 세계'의 '뮤즈'로 삼았다. 그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죄책감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것은 나의, 우리의 '운명'이었다. 나는 이 남자를 영원히 사랑해야 했다. 아니 사랑한다고 그 순간 세포 하나하나에 새겼다.
그가 뒤척였다. 나는 그의 침대 옆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미열이 남아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뜨거운 손이 내 손목을 감싸 쥘 때 나는 알았다. 나는 오늘, 이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나는 그의 심장소리가 듣고 싶어, 그의 가슴에 조심스럽게 귀를 가져다 댔다. 쿵, 쿵, 쿵... 너무나 세차게 울려서 이게 그의 심장소리인지 내 심장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강렬했지만 부담스럽지 않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했지만 한없이 다정했다. 그는 내가 방금 속으로 다짐했던 '영원한 사랑'을 다 들은 것처럼, '나도 너를 사랑한다'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거역할 수 없어 취하기로 했다. 내가, 그가 서로의 입술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나는 그가 내뱉는 모든 숨을 남김없이 마셨다. 그의 입안에서 내가 끓인 '죽'의 향기가 났다. 이것이 이렇게 달콤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입술이 떨어지면 아쉬워서 이번엔 내가 먼저 그의 입술을, 혀를 더 강렬하게 찾았다. 그가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이마, 눈썹, 콧날, 그리고 입술. 내 얼굴은 그의 손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지도가 되었다. 시간과 중력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세상은 멈추었고, 내 위에 올라온 그는 무겁지 않았다.
그가 속삭였다. 하나가 되고 싶다고. 나는 이미 허락했다. 하지만 그전에 나는 그의 얼굴을, 이 영원한 사랑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고 싶었다. 이번엔 내가 그의 얼굴을 만졌다. 내가 그를, 이 남자를, 이토록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영원히 사랑해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말하면 의미가 퇴색될까 봐 눈으로만 말했다. 흰 속옷이 그의 떨리는 세심한 손으로 하나씩 벗겨지려 할 때, 나는 온전히 그 의식에 동참하려 그의 손짓에 내 몸을 맞췄다.
그와 하나가 되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관통했다. 나는 그 아픔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의 세계'가 주는 첫 번째 통증을 견디지 못할 이유가 나에겐 없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잠깐 엄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역겨운 맛'의 세계를 떠나는 딸의 용서인지, 아니면 이 순간이 너무도 행복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진짜 사랑을 하는 딸의 행동을 엄마는 기꺼이 기뻐해 주실 거라고 잠시 생각했다. 몸을 소중히 다루라는 엄마의 당부를, 어쩌면 나는 가장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나를 배려하는 조심스러운 몸짓, 결코 서두르지 않고 오직 나를 살피는 그의 다정함이, 방금 전의 그 날카로운 통증을 밀어냈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경이롭고 충만한 사랑이 나를 꽉 채웠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한 사랑을 해주는 그가 다 느껴져, 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처음이라고 그에게 말하려다, 결국 하지 않았다. 아픔은 점점 증발하듯 사라져 가고, 그 자리는 그가 주는 사랑으로 충분히 젖어들었다.
사랑이 한번 쉬어갈 때, 나는 가쁜 숨을 다듬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딱 한 달만 더 생각해 달라'던 오토바이 남자가 단 한순간도 생각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 그와 완벽하게 헤어졌다. 나는 이제 그 세계를 완전히 떠난 것과 다름없었다. 내 옆에 나를 안고 있는 그가 있었다. 나는 그를 내 가슴 안으로 더 꽉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