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사랑, 불안

: 18. 나는 너의 뮤즈가 아니다

by 황 영


한 달이 되었다. 나는 그가 일하는 공장으로 찾아갔다. 마지막이니만큼 이 관계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온전히 내 의무였다. 공장에 들어섰다. 그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공장 휴게실 쪽에서 쇳소리가 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로 처음 보는 여직원과 시시덕거리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문을 열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이내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지 못하고, 옆의 여직원에게로 비겁하게 도망쳤다. 그녀는 내가 누군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손에 담배가 들려 있었다. 나는 저 담배 끝에서 결국 어떤 역겨운 맛을 보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저 세계에 갇혀, 언젠가의 나처럼 저 맛에 무뎌질 그녀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더 이상 이 냄새 속에서 아까운 시간을 지체하기 싫어, 곧장 할 말을 꺼냈다.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아. 잘 살아."


그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뒤에 있던 여직원을 한 번 힐끗거렸고, 이내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러곤 내 어깨를 잡으며 나를 휴게실 밖으로 밀었다. 어깨에 닿은 그의 손이 더럽게 느껴져서,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 공장 밖으로 향했다. 그것으로 정말 끝이었다. 내 기억 속에서 하나의 흉터로만 남기를 바랄 뿐이었다. 눈물이 났다. 이별이 현실이 되자 가슴속 어디에선가 복받쳐오는 슬픔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를 좋아했었던 감정들, 그와 보냈던 자극적인 순간들이 눈물에 한 방울씩 보태졌다. 하지만 그와의 이별이 아쉬워서 우는 건 결코 아니었다. 내 꽃다운 열아홉, 스무 살을 통째로 그에게 내던졌던 과거의 나, 그리고 이 저급함에서 이제야 도망치는 현재의 초라함이 창피하고 한심해서 터진 눈물이었다. 그에게 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효진이를 만나러 갔다. 효진이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효진이는 내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는 듯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봐 주었다. 효진이가 내게 소주 한 잔을 따라 주며 말했다.


"이제 제대로 좀 살아봐... 울지 마. 이게 울 일이니? 나는 좋아서 웃음이 나온다. 내가 다 후련하다."


효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 받지 않고 대신 문자를 보냈다. 오랜만에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문자에 그는 '즐거운 시간 보내'라는 답을 보냈다. 그와의 이별을 당장 알리고 싶지만, 이 소식도 그를 보며 직접 전하고 싶었다.


다음날 학교로 갔다. 초겨울의 쌀쌀한 캠퍼스, 자주 앉던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를 나눠 쥐고,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나... 헤어졌어."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이 스며들었다. 이별이라는 지저분한 현실을 겪고 온 나를 그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혹시 이별을 후련해하는 나를 독하고 매정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나는 그의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의 닳아진 신발 앞코가 보였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꼭 신발을 사줘야겠다고, 그 와중에 짧게 생각했다.


"고생했어."


그 말을 하고 그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의 품에서 내가 가져다 놓은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이제야 진정한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안도감은 곧바로 '이 행복을 잃으면 어떡하지'라는,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불안'으로 변했다. 이토록 완벽한 행복을, 나는 과연 온전히 누려도 되는 걸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 이 행복이 깨질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어 갑자기 슬펐다.


효진이에게 전화가 왔다. 오토바이 남자가 효진이와 만났고 술에 취해 나를 데려오라고 효진이에게 주정과 주접을 모두 떨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효진이는 그의 모습이 한심하고 우스워서 몰래 그의 동영상도 찍어 놓았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자기가 잘 정리했으니 걱정 말라는 말도 함께 전해 주었다. 효진이가 고마웠다. 언젠가 내가 진정 사랑하는 이 남자를 꼭 소개해 주겠다는 말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나는 그와 한 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학교든, 자취방이든, 어디든. 그와 함께 있어야만, 이 행복이 진짜라는 안도감을 겨우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것은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한, 나만의 '사랑 매뉴얼'을 숙지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짜장보다 짬뽕을, 찍먹보다 부먹을, 액션보다 로맨스 영화를 선택했다. 책은 철학책을, 쇼펜하우어보다 니체를, 댄스보다 발라드를 선택했다. 나는 그 모든 선택의 목록을 이 '새로운 세계'의 지도처럼 머릿속에 새겨 넣으려 노력했다. 나는 감히 그를 변화시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에게 맞춰가려는 내 모습을 보며, 그가 말했다.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해. 나한테 맞추려 하지 마. 그러면 사랑은 금방 지쳐. 너 있는 그대로를 나에게 보여줘. 그게 진짜 사랑이야. 서로가 같으면 행복한 거고, 서로가 다르면 재미있는 거야. 우리 그렇게 서로 지내자. 어때?"


그의 말을 듣고, 어리석은 생각을 한 나 자신을 반성했다. 그의 말은 백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두려움도 몰려왔다. 그가 사랑하는 지금의 '나'는, 내가 그와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닐까. 그에게 내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과연 그가 나를 계속 좋아해 줄까?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말을 따르고 싶었다. 그의 진짜 사랑의 방식에 나를 맞추고 싶었다. 다만, 내가 성장할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는 책을 좋아했다. 자취방 책상도 모자라 방구석까지 탑처럼 쌓여있는 그의 책은 나에게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책을 왜 읽냐고 물었다. 그는 마치 나를 혼내는 것처럼 말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올바른 삶을 살 수 없다고. 그의 무심한 한마디가 내 성장욕구를 찔렀다.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는 책을 읽어야 했다. 무엇보다 나 또한 그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그 삶을 살아봐야겠다는 다짐도 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니체의 책은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대신 쿤데라는 읽을 만했다. 한 권을 완독 했을 때, 이를 해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그에게 책을 다 읽었다고 해맑게 고했다. 그는 그런 나를 '대단하다'며, 아낌없이 사랑해 주었다. 그의 사랑은 내가 그와 함께 발전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보상처럼 달콤했다.


우연히 혼자 학생회실에 혼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어서 슬금슬금 한 발작씩 그에게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훨훨, 훨훨 날아가자. 내 사랑이 숨 쉬는 곳으로.' 목소리가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래까지 잘할 줄은 미처 몰랐었다. '훨훨' 부분을 노래할 때, 학생회실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고, 그 선율은 내 심장 깊숙이 들어와 박혔다. 나는 한참 그의 노래를 들었고, 그의 노래가 멈추는 순간 그를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이 장난기 넘치는 행동에 그가 행복해하길 바라면서. 그는 깜짝 놀랐지만, 내 손길을 알아챈 듯 이내 편안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들었어? 창피한데."

"오빠, 진짜 노래 잘한다."


그날 이후 우리는 노래방에 자주 갔다. 그는 가기 싫어하는 듯했지만, 나는 그의 '훨훨'을 듣고 싶어 그를 졸랐다. 그의 자취방, 그의 품에서도 자장가로 '훨훨'을 불러달라고 그를 졸랐다. 그는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람, 내 남자였다.


불안도 병이었다. 그를 사랑하게 될수록, 이 완벽한 행복을 잃을까 봐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 약이 있다면 구해서 먹고 싶을 정도로, 그가 내 앞에 있어도,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눠도, 난 그가 혹시 내 곁에서 사라질까 봐 불안했다. 애초에 학생회 내에서 비밀연애를 하자고 제안했던 것은 나였다. 이 행복이 너무도 소중하고 완벽해서,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구슬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그 비밀이 불안이 되어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과 모임할 때 책상 위에 올라가, '저 남자가 내 남자다!'라고 크게 선언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대신 윤교수님을 찾아갔다. 윤교수님께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와 내가 사귀고 있다고 말해 버렸다.


"하!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너희 둘, 진짜 잘 어울린다니까. 축하해, 진심으로!"


교수님의 축하를 받으니 마치 주례 선생님의 공증을 받은 느낌이 들어 든든한 행복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그가 시나리오를 다 썼다며, 받아쓰기 백점 맞은 어린아이처럼 나에게 안겼다. 그는 '그의 세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시나리오보다 그를 읽고 싶었다. 그가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 눈부시게 빛났고, 나는 이 완벽한 남자를 붙잡고 있는 내 손에 힘이 빠질까 봐 더 불안해했다. 나는 더 대담해졌다. 그와 더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이대로 불타버려도 후회가 없다는 마음으로. 내가 이렇게나 적극적이고 대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도 놀랐고, 그도 놀랐다. 신께 빌었다. 제발 우리의 이 사랑을 절대로 빼앗아 가지 말라고. 밤이 새도록 간절히, 나는 기도하고 사랑했다.